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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Aug 31. 2016

어떤 대화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에게도 변화는 찾아온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어떤 의식처럼 높은 구두를 신는다. 보통의 나는 중요한 행사일수록 단화를 신거나 운동화를 신지만 요즘처럼 마음이 복잡할 땐 아무 일이 없어도 굽이 높고 앞코도 뾰족한 구두를 신는다.


높은 구두를 신는다고 해서 마음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시작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발볼에 슬슬 압박이 느껴지고 계단을 내려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내리막을 걸을 때면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의 고통도 점점 커진다. 발에 물집이 잡힌 모양이다. 귀가를 할 때까지 후회는 계속된다.


또각, 또각, 또각




며칠 사이에 휘리릭 계절이 바뀌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는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었는데 이제는 창문만 열어도 추워서 잠들지 못한다. 가을도 오기 전에 겨울을 준비하는 것처럼 바람은 서늘하다. 숨이 턱 막히도록 뜨겁던 지난여름을 비웃듯 선선한 날씨는 사람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었고 손에 든 커피의 온도 또한 변했다. 시원한 냉면이 아니라 따듯한 국물을 파는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지난여름 잠잠하던 출근길의 포장마차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어느 순간이 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변화를 깨닫게 만드는 어떤 대화가 있다. 변하기 전의 나였더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 절절하게 이해된다거나, 삼키고 말았을 이야기를 입 밖으로 편하게 꺼내놓을 때 우리는 그 변화를 느끼게 된다.


요즘 뭐해?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안부차 던진 사소한 질문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찾던 5분 간의 짧은 대화를 통해 나는 달라진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 뭐해?"라는 질문은 사실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와 같이 통용된다. 그럭저럭 웃어넘길 수 있는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목에 마비라도 온 것처럼 굳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떤 표정도 짓기 어려웠다.


간단한 안부인사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날 보며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며 웃었다. 그제야 나도 "그러게..."라며 웃었다. 분명 나는 지난 몇 달간 아무 일도 없었고(오히려 평안하다고 믿었고) 선배를 만난 날은 기분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오히려 뜻밖의 장소에서 오랜 인연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컸는데 그 사소한 질문이 뭐 그리 심각하게 느껴진 건지...


시시각각 변화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쌓였을 때 우리는 돌연 그 변화와 마주하게 된다. 물론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혹은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들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을 테지만 막상 '나'는 그 변화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수많은 대화들 중 어떤 대화를 통해 아주 갑자기 '나'의 변화를 감지했을 때 비로소 내게 일어난 작은 변화들까지도 깨닫게 된다.


그날 저녁 선배에게 장문의 카톡이 왔다. 삶이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 혹은 삶의 갈증이 느껴질 때 어렴풋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만큼 난 에너지 있고 그만큼 난 내 삶의 재미를 찾아 누리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선배는 '감히' 이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무기력함이 크게 느껴졌다고 했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조차 눈빛을 반짝이며 커피에 대해 조잘거리던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고... 편안함과 익숙함의 옷을 입은 지금의 나도 나쁘게 보이진 않았지만 유난히 스물셋의 내가 그립다고도 했다.



또각, 또각, 또각


불편한 구두를 신고 나왔는데 설상가상 비가 내렸다. 귀가하는 지하철에서 선배의 카톡을 보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손에 잡히지 않았던 일들, 유독 나를 거슬리게 했던 말들, 어떤 일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시간들이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조금씩 '나'라는 사람을 변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변화뿐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옆을 볼 수도 있었고 의미 없는 딴짓에 흥미를 붙여 보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에 지하철에서 내려 무작정 걸었다. 불편한 구두를 신고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선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 뭐해?" 눈빛을 반짝이며 무엇이든 얘기하는 내가 그립다. 계절이 한 번 더 변할 때쯤엔 나도 다시 한번 달라질 수 있을까. 구두를 신은 발은 불편하지만 옴짝달싹 못하던 마음은 이제 조금 숨을 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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