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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Feb 07. 2017

나쁜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나쁜(Bad)'이라는 수식어와 맞지 않는 분홍색 표지가 인상 깊었던 록산 게이(Roxane Gay)의 <나쁜 페미니스트>(2016)를 읽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남동생에게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선물해놓고 나 자신은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중도 포기했었는데, 동생 녀석은 고통을 꾹- 참고 읽고 추가로 이 책을 구매해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은 한 번 꼭 읽어보라고 권하는 동생 녀석이 기특하기도 하고 설 연휴에 딱히 할 일도 없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록산 게이는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어린 시절 동급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그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했고 그녀 또한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그녀와 비슷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서서히 목소리를 되찾았다고 했다.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손가락질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살게 되었다고 했다.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다 보면 내가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는 건지, 미국 대중문화 평론 매거진을 읽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즐겁게 본 TV 프로그램이 주제가 되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뜨겁게 사랑받았던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서술된다. 록산 게이 그녀가 문화 평론가이기 때문에 해당 콘텐츠 자체에 대한 분석도 굉장히 날카롭고 흥미롭다. 독자의 갈등은 "우리가 왜 이 TV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저자의 질문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자신도 웃어넘겼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절대 웃어넘길 일이 아닌 요소들에 대해 예시를 들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어른 여자'의 욕망을 담은 현대판 동화 판타지라고 평 받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한 그녀의 평이다. 록산 게이는 이 책을 동화를 가장해 '지배-피지배 학대 관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책일 뿐이다...(중략)... 통제적이고 집착적이고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남자의 학대 성향을 독자들에게 아주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지적처럼 여자 주인공인 아나스타샤에게 큰 문제인 처녀성이라던가, 크리스찬의 말도 안 되는 BDSM(가학정 성행위) 성향은 아나를 향한 크리스찬의 집착과 그의 기막힌 섹스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영부영 해결되어 버리고 만다. 


매우 희망적이고 감동적인 영화라고 칭송받는 <HELP>를 그저 공상과학 영화라고 일축한 록산 게이의 평 또한 납득할만하다. 영화는 정말 흑인들을 Helper의 위치로 고정시켜버린다. 백인 여성인 유지니아가 심각한 인권 유린 상태에 처한 흑인들의 존엄성을 되찾아가는 뭉클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 뜯어보면 12~13명의 흑인들의 노예 생활 이야기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유지니아가 미숙함과 불안감을 벗고 자신감 넘치고 인종 문제에 눈을 뜬 독립적 커리어 여성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어쩌면 누군가 이 모든 것을 그저 피해의식을 가진 한 여성이 우리 사회를 이루는 어떤 규칙들에 대해 굉장히 논리력 있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이 너무 과하다며 저지할 수도 있다. 책의 저자 록산 게이는 시종일관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자신은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난이 무서워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길 주저했으며 언제나 여성으로서 독립적이고 싶고 존경받고 싶으면서도 출근길 차 안에서 "비치, 팬티 먹은 엉덩이가 겁나 아플 때까지 흔들어 보시지 Bitch, you gotta shake it till ya camel starts to hurt" 같은 무자비한 가사를 붙인 랩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신나는 리듬에 몸을 흔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소비하고 있었던 문화콘텐츠, 일상 전반에서 불편해야만 하는 지점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이를 성찰해 가는 것이 록산 게이라는 페미니스트가 여러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치이며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기준에서 그녀는 '나쁜(Bad)' 페미니스트일 수 있겠지만, 그 나쁨 덕분에 별생각 없이 세상의 규칙에 순응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늘 내 눈 앞에 펼쳐졌으며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하지만 이런 내게 돌아온 건 여자애가 말이 너무 많다는 타박뿐. 가장 많이 들어서인지, 가장 마음에 남아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말을 듣는 악몽을 꾼다. 꿈이지만 굴욕적이다. 


글을 쓰기 시작해 좋았던 건 아무도 내게 '말'이 많다 핀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가 쓴 긴 글에 별 흥미가 없었고, 어쩌다 읽게 되더라도 이를 단순한 '수다'로 전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다. 어쩌다 마주친 불평등한 상황 앞에서 '다 그런 거지 뭐.' 스스로를 다독였던 적이 수도 없이 많다. 여성으로서, 젊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종종 나의 살풀이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 억누른 감정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글로 꾸역꾸역 달래볼 수 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글로 표현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는 걸 스물여덟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사적인 관계에 있어 결정적인 말의 대부분은 상대를 잠시 불편하게 만든다. 꾸지람을 듣는 것이,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던 나는 여자애가 말이 너무 말이 많다고 타박받고 울음을 터뜨리던 이십 년 전의 나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일단 쏟아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로 쏟아내 말로 담든, 말로 쏟아내어 글로 정리하든. 미숙하고 종종 모순적이겠지만 일단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쁜 페미니스트>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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