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년도 유행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늘 유튜버들의 안목과 패션 브랜드의 룩북을 살피며 요즘 유행하는 옷을 보는 나로서는 참 유행이 중구난방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1.
유행이란 사람을 젊어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와이드 팬츠를 입으면 어딘가 의욕적이고, 주체적이며, 심지어는 제법 예술가스러운 면모가 엿보이는 것만 같다.
물론 젊어보이게 함은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도 그대로다. 그들을 좀 더 어리고, 도전적이며, 때론 힙하게 보이기도 하니.
나이가 찬 내게 유행은 참 양날의 검이다.
따라 가자니, 어딘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고.
따라가지 읺으려고 보니 어딘지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2.
내가 막 대학생이 되는 시기엔 아메카지로 유행이 들썩였다. 무진장 통이 넓은 벌룬팬츠에 작은 티셔츠. 스타일링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는 특이한 실루엣. 동시에 유행하는 밀리터리 아이템들.
물론 그 옆에선 테이퍼드 핏의 유행과 오버핏으로 체형을 보완하는 스타일도 있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쪽이 좀 더 대중적이었다.
학생 때 유행은 아무래도 등산복 위주의 유행이었고 1년의 시간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복이 있었기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래 위를 모두 차려 입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다양한 유행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는 청바지를 사도 딱 맞는 청바지를 내 다리 길이에 맞게 잘라주는게 유행이었다. 매장에서 바지를 입고, 직원이 기장을 잡아주고. 살짝 끼는 느낌이 있었지만 청바지는 늘어나니까.
신발도 그랬다. 꼭 맞게 신는 가죽류의 부츠들. 그야말로 정핏의 전성시대라고나 할까.
전성기를 맞이했으니 남은 것은 쇠락이오. 정반대 핏의 등장이니. 스트릿 전성기가 오며 오버핏이 유행하자 내가 돈 꽤나 쓰며 산 청바지는 유행에서 밀려난 청바지가 되어버렸지만.
3.
물론 모든 유행이 그렇듯. 스트릿 패션도 전성기를 지나 쇠락을 맞이하는 것 같다. 요즘 대세는 사실 미니멀이지, 옛날처럼 무진장 힙한 스트릿 패션은 뭔가 조금 촌스러워 보이는게 있다.
치렁치렁한 장신구. 통 넓은 옷들. 커다란 신발. 힙한 로고.
물론 나는 즐기지 못한 유행이었지만 이때 나는 처음으로 후드티를 구매했었다. 운동화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로고가 크게 그려진 옷도 서슴 없이 구매했었지.
대학생은 유행에 민감해야지. 지금까지 그랫듯. 남들이 고르는게 정답이지 않을까?
물론, 그런 패션도 좋았다.
다만 솔직히 조금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4.
유행이란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계절마다 옷을 하나씩은 사게된다. 트렌드 아이템으로 대표되는 계절의 즐거움이자, 나의 의미 없는 소비이기도 하다.
이번철은 숏자켓이 유행이네?
이번에는 바시티자켓?
이야 요즘엔 시스루도 입네?
이런 식으로 하나둘 사다보면 옷장은 딱 한철 버티는게 가능한, 마치 식재료를 가득 쌓아둔 냉장고처럼 변해있다.
언제부터 옷장에 유통기한이 생긴걸까. 심지어 유통사가 보장해주지 않는 온전히 대중들이 결정하는 유통기한이.
그런 생각이 들며 나는 유행과 조금 멀어지기로 했다.
5.
유행이 큰 흐름이라면 나는 점과 같은 패션을 원했다. 언제 어디서나, 10년 전이든 10년 후든,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여행자의 패션이 필요했다.
언젠가 타임 머신이 발명되고 탑승자가 과거로 갈지 미래로 갈지 애매할 때 입을 수 있는 그런 옷. 내가 원하는 옷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옷이었다.
이런 생각이 드니 옷을 살 때 유행보단 나를 보게 된다.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떠올리고 내 생활에 맞는 옷을 고른다. 때로는 실용적이고, 한편으론 조금 불편하기도 한 옷들.
가장 먼저 구매하기 시작한 건 클래식한 옷들이었다.
6.
클래식은 시간을 가리지 않은다. 청바지는 발명된 이후로 지금까지 즐겨 입고, 셔츠는 어느새 단정함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구두는 운동할 때 빼고는 신을 수 있으니. 우선 하나씩 구비를 해뒀다.
그 다음은 내 생활을 돌아봤다. 사계절을 떠올리고 내가 옷으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을 떠올렸다. 대체로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가 떠올라, 눈비를 막을 수 있는, 혹은 눈이나 비를 맞아도 괜찮은 옷들을 샀다.
신발도 가장 많이 신을 수 있는 운동화를 샀다. 이렇게 하나하나 아이템들을 갖추다 보니 세상에 이제 정말 옷장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입을 옷이 가득하고 용도가 분명하니 나름대로 나만의 규칙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7.
패션을 대화라고 한다면, 나는 참 꽉 막힌 사람이다. 남 신경 안쓰고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덕에 좀 처럼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긴 힘들지만.
아이고... 뭐 계속 변해야 좋은가. 세상에 몇명쯤은 시간여행자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큰 돈 들여 과거를 쫓는 사람도 있고 미래를 쫓는 사람들도 있으니.
나도 그들의 중간에서 점처럼 기준이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러다 운이 좋으면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도 될 수 있겠지. 패션은 돌고 도니까, 망가진 시계 같은 내 옷장도 평생에 두번 정도는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