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눈썹 Apr 22. 2020

서서히 드러나는 본 모습

호식이와 보낸 계절(2편)

베란다에 있는 할머니표 정원은 소박하다.
군자란, 관음죽, 국화, 수국, 로즈마리 그 외에도 이름 모를 귀여운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화분들 속에 할머니가 정한 자리를 지키고 얌전히 지낸다.


현관에 이삿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물건 대부분은 처분하고 왔는데도 3년 간 집을 채웠던 물건은 상자에 포장되어 천장까지 쌓였다. 할머니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혼자서 이 짐을 어떻게 정리하고 포장하고 했느냐고. 전에 3평짜리 집에 놀러 왔을 때는 ‘이만하면 살만하겠다’고 얘기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으시더니. 상자 서른 개 정도가 뭐 그리 대수라고. 짐이 도착한 다음 날, 할머니가 호식이를 넓은 화분에 옮기자고 하셨다.


할머니가 기르는 식물들에 비하면 호식이는 너무 작은 화분에 커다란 몸뚱이를 욱여넣고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어느새 베란다로 나온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리고 다가왔다. 내가 화분을 잡고 할머니가 줄기를 잡았다. 호식이는 원래 화분이 많이 갑갑했는지 금세 쑤욱 빠져나왔다. 그렇게 애지중지 데려와 놓고는, 다시 호식이를 잊어버리고 여기저기 많이도 놀러 다녔다. 몇 개월 간 인도도 가고 태국도 가고 남해도 가는 동안 정작 창문 밖 베란다는 쳐다볼 생각을 않았다. 


어느 아침에 해가 너무 눈부셔서 커튼을 달까 하고 창가에 갔는데 웬 커다란 부채가 창문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세상에 호식이가 창문을 넘어서 자라고 있었다. 호식이는 이미 반려식물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네 개였던 이파리는 일곱 개로 늘어나고, 새로 난 두 이파리는 색은 여리여리 밝은 연두색이었지만 그 위용은 장군감이었다.서울 살 때는 한 번도 씩씩한 적이 없더니, 부산에 사니 너도 좋냐. 


기쁨을 나누려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그 아이 자라는 게 참 희한하다며 왕자라고 부르자고 했다. 호식이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왕자라고 불릴 만했다.그리고 또 몇 개월이 지나, 호식이는 부채를 넘어 우산이 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호식이가 잘 크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호식이를 분양해달라는 친구가 있어서 줄기를 잘라 나눠주고도 싶었지만, 할머니가 섭섭해할 것 같아서 마다했다. 사실 나는 점점 거대해지는 호식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할머니에게도 한계가 왔다. 


호식이의 등장으로 할머니의 깜찍한 정원이 정글로 변하고 있었다. 호식이는 자기 화분으로는 부족했는지 옆의 화분에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기 집에만 만족을 못하고 다른 애들까지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호식이는 원래 정글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라는 종으로, 줄기에서 뿌리가 뻗어 나와 나무둥치를 감싸고 덩굴 형태로 자란다.우리 귀여운 호식이에게 시련이 닥쳤다.

작가의 이전글 불광천 투룸과 함께 맞이한 호식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