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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Apr 22. 2020

분갈이 스펙타클

호식이와 보낸 계절(3편)

내가 호식이를 친구에게 분양해주겠다고 말했을 때는 별 말이 없으시더니, 이번에는 할머니가 호식이에게 자란 긴 줄기들을 정리하자고 하셨다. 인터넷에서 보니 줄기를 잘라서 물에 며칠 담가 두면 잔뿌리가 생기고, 그 상태로 흙에 심어주면 된다고 했다. 가위를 가지고 베란다에 나갔는데, 호식이는 인터넷에서 봤던 자그마한 친구들과는 사이즈가 달랐다. 줄기가 아니라 거의 나무둥치에 가까운 정도였다. 가위로는 전혀 잘릴 기미가 안보였다. 할 수 없이 과일칼을 가져왔는데, 무서워서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며칠을 그렇게 어물쩍 넘기다 상쾌하게 일어난 어느 날 아침에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리라. 


할머니까지 대동하고 베란다에 나갔다. 호식이 줄기는 한 번에 잘리지 않아서 여러 번을 쓱싹쓱싹 잘라야 했다. 식물은 작은 자극에도 크게 무리가 온다고 하던데, 내가 다치게 하면 어떡하지? 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자라는 아이인데 단지 내가 보기 좋으려고 이래도 되는 걸까. 넓은 화분에 옮긴 게 화근이었나. 괜히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호식이가 쇼크를 먹기 전에 내가 먼저 쇼크를 받을 것 같았다.


팟캐스트를 크게 틀어놓고 겨우 첫 줄기를 잘라냈다. 이왕 자르기 시작한 것,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하나, 둘, 셋, 네 개를 자르고 결국 줄기 세 개만 남겼다.충격이 가시지 않아 어버버 하는 동안 할머니는 잘라낸 줄기 네 개 중 이파리가 가장 큰 두 개를 손으로 북북 찢고 있었다. 이런 거친 여자. 왕자니 어쩌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었는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할머니는 개운한지 껄껄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잘라낸 줄기에도 공중 뿌리가 구불구불 길게 나 있었다. 


할머니는 줄기를 심기 전에, 뿌리를 조금 잘라내자고 했다. 얼이 나간 채로 할머니에게 얼마큼 자를까요? 물었다. 할머니는 뿌리의 가운데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조금 많이 자르는 것 같긴 한데... 내심 걱정을 하며 가위질을 못하고 있으니 할머니가 '어차피 잘 자라는 아라서 괜찮다. 그냥 잘라삐라.' 하셨다. 그 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다. 줄기를 자른 후 물에 담가 둬야 하는데 생각이 안 났다. 할머니의 지휘에 따라 줄기들을 흙에 바로 심었다. 그 날은 무서워서 창문을 닫고 호식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그 후 며칠간은 괜찮아 보이더니, 일주일쯤 지나니 한 이파리가 시들시들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머지 이파리도 상태가 나빠졌다. 줄기를 자를 때보다 더 무서운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할머니와 나 둘 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호식이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심란해졌고, 할머니도 허탈한 웃음에서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할머니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기르는 친구고, 줄기도 내가 잘랐으니까 내가 다 잘못했다고. 할머니도 정리하고 싶었으면서, 솔직히 너무했다. 할머니는 이제 와서 영양제를 꽂아주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영양제는 독해서 한 방에 주면 안 되는데. 결국 두 줄기 다 생을 다하지 못했다. 다시 흙에서 파내는 것은 차마 내 손으로 못 하겠어서 두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어느새 이미 정리를 했다. 뿌리는 그대로 두고 흙 위로 올라온 줄기를 바짝 잘랐다.


나를 조종해 호식이를 자그맣게 만들어버린 할머니가 사악한가, 나쁜 임무는 할머니에게만 맡기는 내가 더 사악한가.현재 호식이는 처음 꼬막이가 보내준 모습에서 겨우 줄기가 하나 더 생긴 모습으로 돌아왔다. 할머니 정원에 어울리는 얌전한 모습으로 베란다 한 켠에 있다. 다시 언제 본성이 드러날지 모르지만, 그때는 내가 할머니에게 휘말리지 않고 정말 살뜰히 키워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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