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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Jan 21. 2020

어설프지만 자연스럽게

쇼트커트 헤어(2편)

엄마가 과수원에서 일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팔을 다치셨다.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맨 얼굴에 안경을 쓰고 병문안을 갔다. 깁스를 하게되어서 밥은 어떻게 해먹을지 걱정이라고 하더니, 태평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조심하지 않고 허둥지둥하다 넘어졌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와 병실을 같이 쓰는 분들에게 야쿠르트를 돌리면서 인사를 했는데, 한 할머니가 나에게 “총각~ 고맙데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하하하 웃으면서 내 기분을 살폈고, 내 성별을 잘 못 짚은 할머니도 곤란해했다. 내심 흐뭇했다. 이젠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겠다. 화장을 안하고 나온 날엔 사람들이 나를 남자라고 생각할것이다. 성별에 얽매여서 사람들을 가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여성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머리가 짧아지니 무례한 사람에게 기선제압을 하는 것도 수월하다. 표정을 조금 딱딱하게 지어주면 긴머리 시절일 때보다 쉽게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 수 있다. 내 외모가 젊은 여성일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에 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어서인지, 그냥 나에게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편리하다.


친구들도 숏커트를 많이 했다. J가 가장 처음이었다. 20대 초반, 진한 화장에 킬힐이 지원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J는 자신이 풍기는 이미지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커피우유를 먹을 때 우유곽에 어울리는 빨대색을 고르고, 약간 빈틈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손등에 붙였다. 그러던 그녀는 10년 동안 점점 편한 옷과 낮은 운동화를 구비하더니 어느 새 머리를 싹둑 잘랐다. 머리를 그렇게 자르고 나서 요즘은 거의 립스틱만 바르고 다닌다. 어느덧 간단한 연출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그녀는 자연스러워서 멋있다.


길을 다녀보면 숏커트 스타일을 한 여성을 하루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데, 친구랑 둘이 같은 머리를 하고서 나타나면 웃음이 터진다. 혼자 다닐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두 명이 있으면  ‘ 나를 함부로 대하거나 멋대로 넘겨짚지 마시라.’ 이렇게 주장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함부로 말하고, 생각을 지레짐작한다.


명절에 집에 갔는데 친척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남자같은 스타일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친척은 아주 집요하게 내 심기를 건드렸다.


친척 : 사람들이 머리자른거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니?

나 : 별 말 안하는데요.

친척 :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짧은 머리를 안하니까 뭐라고 말 할것 같은데?

나 : 제 주변 사람들은 크게 신경 안쓰던데요.

친척 : 그래도..사람들이 관심 가지니까 좋지? 그렇게까지 짧게 자르는 건 솔직히 주목받고 싶어서 자른거잖아.

나 : (짜증스럽게)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가 젊은 여자라고 무례하게 대하는 게 싫어서 강하게 보이려고 자른거에요.


이렇게 열을 내면서 대화가 끊어졌지만 그 분은 계속 옆 사람에게 수군수군거렸다. 나는 친척들이랑 예민해질만한 대화가 시작되면 금새 짜증을 부리는데, 그쪽에서도 십년이 넘도록 지치지 않는 게 대단하다. 별 생각 없이 자른 머리였는데 어쩌다보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과연 숏커트를 한 채로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피곤했던 친척들과 만남 후에 아프리카댄스 학원에 갔다.  정수리 부분은 땋고 아래쪽은 밀어낸 사람을 보며, 뒷통수에 진 주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거친 파마머리를 한 사람도 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새카만 머리칼이 건강해보였다. 밝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의 머리를 보면서 다음 번엔 어떤 머리를 해볼지 생각했다. 저번에 공연에서 봤던 댄서분처럼 나도 레게머리를 하면 에너지가 넘쳐보일까? 누군가의 사진에 찍힌 나의 겸연쩍은듯 웃는 얼굴에다 레게머리를 합성해서 떠올려보았다.으..엄청 이상할 것 같다. 역시 그런 스타일은 사람들 눈을 잘 마주치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겠지.


신이 나서 추임새를 넣으면서 춤을 추는 선생님을 보았다. 또 5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아까 배운 동작이 이게 맞았던가?’ 하고 삐걱삐걱거리면서 춤을 추는 모습도 보았다.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서 헤헤헤 웃었다. 아무리 수줍음을 많이 타도, 주어지는 모든 일을 어설프게 마무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인생 하나만 제대로 살면 되는것 아닌가? 엄마의 어리버리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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