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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Feb 12. 2020

호박죽 이야기

종일 비가 내렸다.

젊은 여자는 냉장고에 있던 추어탕을 데워먹고 핸드폰을 보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반나절 지나니 허리가 아파서 할 수 없이 일어났다.


거실에서는 아까부터 나이 든 여자가 늙은 호박과 한 판 승부를 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어서 오늘따라 더 조그맣게 보이는 그녀는 호박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거 그냥 두면  썩어버린다


젊은 여자는 거실 소파에 누운 채로 나이 든 여자가 하는 혼잣말을 들었다. 그렇게 한참 낑낑대더니 결국 호박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이게  뭣이고


그녀는 기가 막히면서 한편으론 흐뭇한 듯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살라고 애를 쓰네. 예전에는  그러더만 야가  이랄꼬. 이러다가  썩어버리제.


젊은 여자는 무엇 때문인가 궁금해져서 소파에서 엉금엉금 기어갔다. 호박 안에서 콩나물 같은 새싹들이 삐쭉 튀어나왔다. 하얀 줄기들이 엉켜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워만 있어도 배는 고팠는지 파와 양파를 볶아서 짜장라면을 해 먹었다. 혼자 먹기가 민망해서 나이 든 여자에게도 한 입 주고 챙기는 시늉을 했다.


어느덧 호박은 껍질까지 다 벗겨져 부엌으로 왔다. 젊은 여자가 짜장라면을 만들어 먹었던 냄비를 씻는 사이 나이 든 여자는 어느덧 호박을 썰은 솥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평소엔 그 큰 솥을 혼자서 들지 못하는데 오늘은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젊은 여자가 왜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나이 든 여자는  자기는 원래 혼자 할 수 있으면 혼자 하는 게 마음 편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젊은 여자가 소파에 가서 누우려는데 나이 든 여자가 말을 건다.


-(찹쌀가루를 담은 봉지를 꺼내며) 이거 마른 손으로 뭉쳐져 있는   풀어봐라.

(찹쌀가루를 만지며) 그래서  가루는 언제 넣는 거예요?

-이따가 펄펄 끓으면 호박 위에 뿌려서 덮어라.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이따가 한번  넣어주라. 그러면 그게  개가 떡이 생기거던. 나는 새알 넣는  보다도 이렇게  먹는  맛이 낫더라. 그다음에는 이거 남은   넣어서 호박이랑 섞어주면 되게 되지.


젊은 여자가 찹쌀가루를 푸는 일에 몰두하다 옆을 보니 나이 든 여자는 그 새 또 솥을 바닥에 내려서 호박을 으깨고 있었다.


어느덧 사위는 어둑해지고 형광등 하나만 켜 둔 부엌에서 두 여자가 각자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젊은 여자가 먼저 일을 끝내고 호박 으깨는 일을 도우려 체반을 단단히 잡았다.


-(국자로 호박을 으깨며) 이게 끝이 없다. 내를 죽일라고 하는 거제. 야야 근데 니는 이거 알라고 하지 마라. 이거  시간 있으면 얼굴을    가꿔라그러면 호박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면 어떡해요?

-호박죽 끓일  아는 사람한테  끓이보라고 하면 되지. 이거  시간 동안 하고 있어서 뭐하노. 이래 많이 끓여서 사람들 나눠줘 버리고 내는  그릇 먹고  건데.  할라꼬. 하이고 오늘  시간째 이거를 하고 있노. 가루 이제   넣어보자.


가루를 넣고 뚜껑을 닫았다. 두 여자는 성미가 급한 게 닮아서 뚜껑을 열고 싶어서 서로 눈치를 봤다. 솥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나이 든 여자가 먼저 뚜껑을 열었다.


어느덧 뿔뿔이 흩어져있던 가루들이 나름대로 둥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봐라 이렇게 떡이 된다. 아이 근데 아직  되겠다. 닫아놔 봐라.


솥이 한 번 더 끓은 후 가루를 한 번 더 넣어서 떡을 만들었다.

나이 든 여자는 호박죽에 넣을 콩을 삶은 솥을 태워버려 수세미로 바닥을 박박 긁었다. 젊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루를 솥에 털어 넣고 휘휘 저었다.

완성한 호박죽을 식탁에 놓고 사이좋게 앉았다. 맛이 별로 없었다. 떡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근데 떡이  어디가 버렸노. 찹쌀이랑 맵쌀이랑 섞었던 건데, 떡이 생길 건데 어디로  갔을꼬.

바닥 쪽에 있을 수도 있지요. 근데 콩에서 비린 맛이 나는  같은데요.

-콩을 삶은 다음에 헹궈서 넣으면  그런데 내가 깜빡 잊어버렸네. 아까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묵으라. 뜨거워서 그래도 먹을만하네.


젊은 여자는 가슴 쪽이 울렁울렁했다.

귀찮아서 그런건가.

더 이야기를 이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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