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가 많은 삶

by 권눈썹

좋아하는 뮤지션의 수업을 들으러 경주에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낮에 할머니와 빨래를 너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사방팔방 잘 찾아다니냐’ 물으셨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만 할줄 알면 어디든 찾아가기 쉬운 세상인데 할머니에게는 신기하게 보이나보다.


할머니는 ATM기를 혼자서 사용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늘 은행업무를 보셨기 때문에 할머니는 배울 기회가 없었다. 내가 알려드리려고 해도 어렵다고 배우지 않으려고 하셨다. 운전도 할줄 모르신다. 늘 다른 사람이 운전을 해줬기 때문에 그럴거다.


할머니는 초등학교까지 졸업했고, 할아버지는 대학교까지 나오셨다. 교육격차가 컸던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게된 건 본인이 먼저 편지를 써서 가능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늘 자랑스럽게 하신다.


할머니는 모든 일을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아흔이 넘으신 지금도 집안 대소사에 보스로 활약하신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본인이 모르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두고두고 화를 낸다. 요즘 시대 태어나셨다면 아마 성공한 CEO는 어렵고 그의 왼팔 정도 되었을 거 같다.


할머니와 사는 게 전보다 편해졌다. 할머니와 부딪치는 이유도 우리가 너무 비슷해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라는 말 있지 않나? 나도 어떤 일을 맡으면 내가 다 컨트롤 하려는사람이다. 그것 때문에 사이가 나빠진 인연도 몇 있었다. 내가 대장이 되어 동료가 서포트 해주는 건 환영하지만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주장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면허가 있지만 운전을 못한다. 면허 딸때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집중을 못해 운전학원에 100만원은 썼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그 기억때문에 면허 취득한 후에 운전을 해본 적이 없다.


잘하는 것은 대장을 해야하지만 잘 모르는 건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우리 둘의 공통점이다. 못해서 안하는 것과 할수 있는데 안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할머니가 혼자서 은행업무를 볼 수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단 경제적인 부분에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할머니가 운전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답답해도 집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할머니가 영어를 할 줄 알았더라면 어쩌면 외국에 사는 가능성을 생각해봤을 수도 있다.


젊은 시절 동네 최고 킹카에게 편지도 쓰고, 자기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외상값을 받아내고, 머리에 쌀 한가마를 이고지며 언덕을 수없이 넘었다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집안일의 모든걸 컨트롤 하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만 본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기가 할수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집안일 말고 다른 것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우리가 더 재미있게 살수도 있었을텐데.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살면서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선택지가 많이 없을때는 하나를 놓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불안하다. 반면 선택지가 많으면 하나를 놓쳐도 다른 것을 취하면 된다. 불안하지 않으면 여유가 생긴다. 배우는 것은 언제나 득이 된다.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배움뿐이다.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때는 선량한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원하는 하루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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