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괴짜소리를 듣는 몇가지 부문이 있는데 재활용에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물건을 하나 사면 오래쓴다. 지금 입고있는 외투도 초등학생때 엄마가 사주신 패딩이다. 디자인이 살짝 촌스러워서 그렇지 망가진 데도 없고 따뜻하다. 작업실에서 입기에는 괜찮아서 애용하는 겨울철 작업복이다.
이면지도 잘 버리지 못한다. 회사 다닐때 잘못 출력된 종이는 파쇄기에 넣어 버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버리는 종이를 모아 연습장으로 활용했다. 지금은 노하우가 생겨서 서류봉투를 잘라서 표지를 만들어 아예 노트로 만들어 쓴다. 종이 크기별로 노트를 만들어서 메모장부터 아이디어노트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앞 뒷면을 모두 사용한 이면지노트를 다 쓰고 나면 그제서야 맘편히 버릴 수 있다.
플라스틱병은 깨끗이 씻고, 뚜껑은 따로 모아서 수거함에 반납한다. 컵라면 먹고나면 스티로폼을 해에 말려 하얗게 되면 버린다. 커피 찌꺼기도 바로 버리지 않고 햇빛에 말려서 방향제로 사용한다.
길을 가다 소품이나 가구 같은 것이 버려져 있으면 유심히 본다. 비오는 날 우연히 맘에 드는 의자를 발견해 낑낑대며 주워온 적도 있다.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친구들은 남이 쓰던 물건에는 귀신이 씌여있다느니 하며 겁을 주지만, 버려질 뻔한 물건에 새로운 용도를 찾았다는 게 좋다. 그리고 누군가 버릴 정도로 오래된 물건은 요즘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멋이 있다.
구질구질해보여서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말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재활용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 쓰레기를 만들기만 하는데 버리기라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릴 때부터 재활용은 일상에 묻어 있었다.
초등학생때 정부에서 *아나바다 운동을 권장했는데 그 때문인지 학교에서 벼룩시장을 여는 등 재활용 관련 이벤트가 많았다. 미술학원에서도 선생님이 평소에 뭐든지 그리고 싶은 걸 많이 그려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전단지 뒷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고. 전단지로 종이접기 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단지가 보물인양 열심히 모았다.
친척들이 입던 옷도 자주 물려입었다. 어릴 땐 언니들이 하는 건 다 좋아보여서 그랬는지 사촌언니 옷들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커서 직접 옷을 사 입을 때부터는 유행따라 다들 입는 옷은 입기 싫고, 마음에 드는 옷은 너무 비싸서 구제를 구입하러 남포동을 자주 들락거렸다.
가족들도 재활용을 열심히 한다. 우유팩을 모아서 주민센터에 가져다주고 두루마리 휴지를 받아오는 것도 엄마에게 배웠다. 할머니는 90의 연세에도 아직도 일일이 종이박스 테이프를 제거하고 매주 재활용을 내다놓으신다.
갖고 싶던 물건을 택배로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뒷맛이 쓰다. 반면 버릴 뻔한 물건을 다시 쓰면 찝찝함 없이 기쁨만 있다. 어제 애인과 남포동에 놀러가서 만원 주고 외투 하나를 건졌다. 백화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디자인. 멋있으면서도 뭔가 유머러스한 게 나에게 찰떡이라 입자마자 바로 구입했다.
보통 놀러가는 깡통시장을 벗어나 대로를 건너니 부쩍 평균연령이 높아졌다. 여인숙과 오래된 찻집을 지나니 옷수선 간판이 걸려있는 가게들이 나타났다. 요즘 가게들처럼 취향에 맞게 색깔따라, 사이즈 별로 정리는 커녕 '오천원' '만원'으로만 구분된 행거에 마구잡이로 걸려있었다. 어떤 재밌는 물건이 있을까 신이 났다. 원래 모르는 사람과는 말을 잘 섞지 않는 편인데 어제 가게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 손님과는 농담까지 던지면서 쇼핑을 즐겼다. 비슷한 주머니 사정에, 구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마음이 풀어졌다. 애인이 지난주에 먼저 아는 형님과 남포동에 가서 쇼핑하며 내 옷도 하나 사다주었는데, 어제보니 그 먼지 구덩이 속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줬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버려지기 직전인 물건들 중에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이 값지게 느껴졌다. 에어팟 프로 선물 받았을 때보다 약간 더 좋았다.
언제부턴가 '제로 웨이스트' '레스 웨이스트'라는 용어와 함께 재활용이 환경을 생각하는 멋진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 트랜드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제로 웨이스트 관련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친구들이라도 나는 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로 웨이스트가 힙한 유행으로 여겨지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고 뿌듯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경험으로 공감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재활용 사랑이 유난스러운 사람의 기행이 아니라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는 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
*아나바다 : 아껴쓰다 나눠쓰다 바꿔쓰다 다시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물자를 낭비하지말고 재사용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