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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Dec 31. 2016

담담하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 (17)

'아, 그때.'



꿈을 꿨다. 나는 어딘가에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은 나를 날려버릴 듯 해서 발끝에 잔뜩 힘을 준 채 버티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아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도 없이 아래만 바라보고 있게 된다는걸. 균형을 잃을까 몹시 겁이 나고 두려워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 검은 심연과 눈을 맞추고 얼어붙어 있게 된다는걸. 빨려들어갈듯이.


그러나 그 때 누군가 나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 바람에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이제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긴장감에 뻐근해진 목을 한바퀴 빙글 돌리는데 새파란 하늘빛이 눈가를 스쳤다. 한여름에 마시는 블루 레몬에이드처럼 시원해보였다. 그가 땀으로 흠뻑 젖은 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저 하늘에 몸을 담그면 시원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망설임 없이 나는 달려나가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2016년을 잘 보내주기 위해 올 한해 만든 좋은 기억, 나쁜 기억을 되돌아본 열일곱번째 노아, '고마워 2016' 워크샵. 유난히 커피향이 향긋한 강남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연말의 일요일 오후를 함께 했다. 원래는 스태프들끼리 간단히 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문득 다들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열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과는 달리 정말 큰 울림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



새로 발견한 좋은 장소. 방들이 미로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조금 헤매야 한다. 지도가 있어서 다행.



꿈꾸라, 그래야 이루게 되리라.



프로그램은 무척 간단했다. 종이 한 장에 올해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적어보는 것. 누군가는 페이스북을 일기장으로 쓰고 있기에 스크롤을 쭉쭉 내리며 일 년간의 기록을 살펴 보았고, 다른 누군가는 스케쥴 어플이나 다이어리을 참고하였다. 기록을 남기지 않은 누군가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적어내려가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어서 처음에는 랄랄라 들뜬 분위기였는데 4월이 넘어가자 다들 말이 없어지기 시작해서 7월 즈음 되니 아주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들리는거라고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밖에 없었고 방 안은 습한 열기로 점점 뜨거워졌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일들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백 마디의 설명을 들어도 절대 실감할 수 없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간에도 나중에 '아, 그때.' 정도의 표현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온 몸에서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겠지.



나의 자존감도우미 NU님 항상 감사합니다.



무언가가 떠오른다면 기분탓입니다.



일 년은 1월부터 12월까지이지요.



U님이 선물해주신 달다구리 케이크. 감사합니다.



나에게 '아, 그때.'는 연필을 꼭 쥐고 있던 손이 아파 잠시 쥐었다 폈다 하며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았던 기억. 한 명, 한 명, 한 명.. 어느새 나에게 익숙해져버린 이 사람들은 불과 일년 전 이맘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완전한 타인이었다. 길을 걷다 만나도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 지금 이렇게 모여 인생의 한 순간을 공유하고, 길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주 상큼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라워 눈물이 핑 돌았다. 유난히 향긋한 커피향. 달콤한 케이크. '아, 그때.'의 온기는 그렇게 담겨왔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을 또 하나의ㅡ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순서는 NU님이 준비해주신 '나쁜 기억 지우개'로 각자가 적은 2016년의 기억들 중에서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을 골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은 알록달록한 유성펜으로 덧쓰고.) 쓱쓱 싹싹 글자들을 지우며 내 안에서 그 일이 사라져버리기를 기도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다는 근사한 예감이 들었다. 자, 이제 나쁜 기억을 지워주세요. 내가 말했고, 우리는 작은 지우개를 들고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방 안 흐르던 아주 짧고 긴 정적. 그리고나서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걸 깨달았던거다. 아무것도 지울 게 없다고.


분명 그 당시에는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자고 일어나면 모두 없던 일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종이 위에 가지런히 적힌 서술들은 멍한 눈빛으로 얼음 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생선들처럼 이미 생명력을 잃었다. 어쩌면 글자가 되어 쓰이는 동시에 우리에게서 떠나버린걸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지워버릴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감정은 흐려지고 상처는 희미해졌으니까.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싶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기억이 있어야 그 순간 순간을 힘껏 버텨온 나도 있다는걸 깨달은거다.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라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흔적들은 분명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선명한 이유였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서로를 인정할 근거를 또 한가지 마련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의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고 상장이라도 되는 양 곱게 접어 보관해둔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2016년, 잘 보냈다. 후회 없이 보내줄 수 있다. 이제.


고마워 2016년. 굿바이 2016년.








그 날 감기로 아쉽게 참석하지 못한 M님과 함께 송년 여행을 다녀왔다. 책도 선물받았다. 나의 기록에 들어와주어서 고마워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살이 3년째. 죽었다 태어난 것처럼 살아보자는 각오로 올해를 시작해서 나는 많이도 실패하고 또 그만큼 새로워졌다. 교언영색이었지만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가까운 사람 몇몇만 안다. 그래도 이제 자아라고 부를만한 내면의 심지도 자라났고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 분야도 생겨서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곁에 좋은 사람들을 넘치게 얻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닮고싶은 점을 가지신 훌륭한 분들 곁에서 늘 배우고 고민을 여쭤볼 수도 있어서 감사하다. 잊지않고 연락나누는 분들과 편히 이야기 나누며 밥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관심과 선물(중요)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착한 직장동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모임을 열면 기꺼이 와주시는 분들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황송하게 감사하다. 때때로 보고싶은 얼굴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오래된 친구들을 찾아갈 수 있어서 안심되고 감사하다.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는 남자친구가 있어서 감사하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내가 있어서 사랑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음에 쌩유베리감사하다. 다른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나는 참 고마운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항상 함께해주는 사람, 지켜봐주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감사합니다. 고마웠어요. 모두모두. 정말로요. ♡


- 2016년 12월 29일 페이스북 담벼락에 눌러쓰다,








본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모임은 '노아 Know-我'란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2016년 초 꽃향기 가득한 강남의 한 카페에서 독서모임의 형태로 시작되었구요. 현재는 월 2~3회 다양한 장소에서 독서모임, 자기분석 워크샵, 골목탐방, 낭독과 글쓰기 등 여러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답게 사는건 무엇인지, 나를 사랑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궁금할거에요. 지금의 선택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알고 싶을거구요.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나만의 기준을 하나 하나 세워나가다 보면 스스로 답을 찾아낼거라고 저는 믿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고 격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삶의 작은 목표들을 이루며 나가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거라구요.


한 테마에 10명이내의 소규모로 모집하고 있어요. 진솔한 대화가 오갈 수 있게요. 누구든지 오실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분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저희 모임의 가치는 '자기를 말로 표현해보는'데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내 말에 귀기울여 주었기에 가능합니다. 그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러니 경청과 존중으로 보답할 수 있는 분들만 참여해주세요.


함께하실 분들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문의 또는 참가신청은 저의 페이스북메세지로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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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2016. 럭큐레이터. 1일 1책 1글을 행하며 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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