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가로누워있던 그녀는 책의 서두에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넘어가지지 않는 페이지가 그와 자신의 진척 없는 관계 같았다.
'그는 나를 어떤 의미로 곁에 두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치사스럽다면 다행이지 묻는 거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네 형편에 뭘 기대하는 건가? 이런 마음으로 그가 본다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숨을 곳이 없다면.. 무척 창피할 테니까, 죽이지 못하면 그 두 눈을 뽑아버릴까 그 생각도 했다. 그럼 형편이 좀 맞춰지려나?
'어디까지 간 거야 그러지 말자'
푸훕 그저 웃고 말 상상이었다. 괴기스러운 발상이지만 움츠려드는 마음을 퍼올리기엔 B급 유머러스함이 괜찮다. 떨어지고 있던 감정을 스톱 버튼으로 멈추고 나니 '툭, 툭, 툭'소리가 이제야 들렸다.
'참 나 설거지하던 중이었지'
마흔이 되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새해밥을 먹고 난 후하던 것을 지속하기가 힘들어졌다. 설거지를 하다 어느새 소파에 누워 손에 책을 들고 있지를 않나 오늘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은 지 10년 된 아파트지만 주방 개수대에 물을 온/오프 하는 장치가 바닥에 있었다. 사용할 일 이 머 있다고 손 한번 움직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두고 신식이라고 생색을 내나 싶었지만 아주 유용한 장치였다. 한 손에 면을 삶은 냄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헹굼채를 잡고 면을 채에 들이붓는 동시에 찬물을 끼얹고자 발로 한번 꾹 바닥에 깔린 장치를 밟아주면 물이 콸콸 나와 면을 식혀줄 수 있었고 김칫국물 범벅의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세척할 때도 손잡이 더럽히지 않고 발끝 한번 까닥하면 헹궈낼 수 있었으니 우습게 보던 처음과 달리 그녀는 이 장치를 중간에 한번 고치면서까지 쓰고 있었다. 바닥 장치는 문제가 없는데 손을 쓸 일이 생겼다. 바닥 밟는 것만으로 물이 완전히 잠가지지가 않았다. 결국 손으로 개수대의 손잡이를 닫아주어야 했다. 그것을 닫지 않고 두면 저리 지치지도 않고 물이 한 방울씩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식기세척기에 잔잔한 그릇들은 돌리고 음식물 찌꺼기를 봉투에 담고 냄비를 닦으려다가 '띵'이란 휴대폰 소리에 고무장갑 빼고 잠시 앉은 소파에서 어느새 새우마냥 누워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란 노랫말처럼 그의 생각으로 돌고 돌았다.
'정말 내게 호감이 있는 걸까?'
얄팍한 의구심이 자정에 설거지하는 마흔 아가씨를 찾아와 노크하니 두들겨지는 것이 마음인지 거 품질 중인 냄비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휘이 물렀거라 워워'
발바닥 한번 탁 치니 찬물이 한 움큼씩 쏟아져 나왔다. 세제칠된 냄비를 씻겨내니 겨우 마음도 진정되는 거 같았다.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로 묻지는 않겠어'
앞에 3자를 달고 있던 서른아홉만 해도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세우지는 않았는데 그간의 경험 탓인지 마흔이라는 무거운 나이 탓인지 어린아이 마냥 퐁당퐁당 궁금한 것을 물어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 밤 그는 잠이 오는지. 여느 평일 날과는 다른 인사를 주고받는 금요일 아닌가. 젊은이들의 용감한 불금까지는 안 가도 여유로운 휴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금요일에 연락이 없는 남자. 참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