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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Feb 10. 2023

3. 엄마와 김치찌개

    

그와 첫마디를 나누었던 곳도 이 나무랄 데 없는 카페였음이 떠올랐다. 잊고 있다 떠오른 사실은 아니다. 해내야 하는 일과 속에서 잘 풀리지 않아 멈춰질 때 비상약처럼 갖고 다니던 미니 스닉커즈를 뜯어먹듯이 기운이 처지면 떠올려보는 달달한 기억조각들이 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은 가장 최근 업로드 된 생생한 것이다. 근래는 이보다 강력한 초콜릿이 없다. 지금 이것을 꺼내 먹으려는 건 뒤집어 보면 불편한 마음이 그녀를 몹시 예민하게 몰아세우고 있는 중이란 반증일 테다. 불금의 밤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고 일어나 맞이할 주말 내 그에게서 연락이 없으면 어쩌지 그게 더 고민스러웠다. 먼저 다정한 사람인양 안부를 물을까? 아니면 아주 쌈박한 성격인양 차 한잔 콜? 하며 연락할까 그도 아니면 연락이 올 때까지 무 대응으로 시간을 흘러 보낼까 이 생각의 답을 찾는 것도 버거운데 이 선택의 상황이 정말 오면 어떡하지 싶어 그때마다 가슴이 두둥두둥 그녀를 건드렸다.      


‘아으 그만 생각하자 그만. 힘들어서 못해먹겠네 자자 자고 일어나면 알게 되겠지’     


결국 mbti 중 I 답게 무대응을 선택했다. 글을 쓸 것도 읽을 것도 아니면 잠이나 자야겠다고 맘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장자리가 푹 꺼지긴 했지만 청결하고 안락한 침대다. 옴치락 굼치락 거릴 때마다 사각거리는 이불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는데 오늘은 왜 이리 허전하게 들리는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이불속에서 휴대폰을 켜고 유튜브 영상을 찾았다. 영화나 드라마 몰아보기는 밤을 새우게 만들 테니 안되고 경제방송은 집중이 전혀 안될 거 같아 패스 스토리가 있는 영상이면서 너무 재밌으면 안 되는 것이 필요했다.  

   

‘여행 이게 좋겠어 유럽 속으로’     


감각을 마비시키기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 치유법 중 여행은 좀 비싸도 가장 빠른 효과를 주지 않던가. 그녀는 센강이 보이는 오랜 과거엔 하인들이 묶었다는 더울 때 덥고 추울 땐 더 춥다는 다락방 월세살이를 하면서도 프랑스를 사랑한다며 자신이 묵고 있는 방부터 카메라에 담아 소개하는 어느 청년의 영상을 보다 보니 의식이 흐려져 갔다.  어느샌가 그녀는 파리의 도보 위에서 센 강으로 물들인 짙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슬링백구두 굽소리를 내며 걷고 있다. 저 멀리 퐁네프의 다리를 걸어오는 그이가 있는데 손짓하는 것이 아는 이던가, 저 인사는 그녀를 향한 것인가 아님 유튜브 채널 주인인 청년인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잠이지만 늘상 자던 시간이라 그런지 토요일 아침 볼 만화영화도 없는 나이인데 눈이 일찍 떠졌다. 밖에선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무와 양파의 단내가 방안까지 들어왔다. 집 앞 슈퍼 빨대커피를 사러 나갈 때 엄마가 찌개용 돼지고기도 부탁했던 게 생각났다. 10년 차 대단지 아파트 상가에 그녀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웬만큼 자리 잡았다. 급할 때 하나 두 개 살 수 있는 상가들이 편리했기에 수지타산 안 맞아 털고 나가면 안 된다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 엄마를 위해 그녀는 배달보다 다소 더 비싸더라도 집 앞 슈퍼와 정육점을 이용하는 편이다.      

눈곱만 떼고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음 ~ 계란프라이는 내가 할게”

“음~이 끝이야? 왜 맛없어 보여?”

“당연히 맛있겠지. 엄마가 했는데... 40년을 해 먹이고도 맛없을까 걱정해?”

“어제 먹은 너와 오늘 먹는 너는 다르니까”

“이러니 내가 시집을 못 가 엄마 같은 남자가 세상 있겠냐고”

    

어릴 적 할머니는 엄마 나이대에 손도 생각도 자글 했던 거 같은데 엄마의 육십 대는 아직 젊네 라는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었다. 그녀는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일화가 있다. 집 앞 공터에 앉아 음식 부스러기로 비둘기를 유인해 목을 부러뜨려 잡아오신 적이 있으셨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 갖고 들어오셔서는 애비 먹이라며 엄마에게 내놓으셨는데 그때 엄마는 너무 놀라셨지만 ‘네 어머니’ 하신 후 몰래 묻어 주었다고 하셨다. 과정은 잔인했으나 자글한 노모의 아들 생각하는 마음은 탓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무엇이든 보양시키고 싶어 했을 치매 초기의 할머니는 다음 해 돌아가시고 어미의 모정을 받고 웃으시던 그녀의 아빠도 같은 해 돌아가셨다.

그때가 그녀 중학생 때이니 딱 그녀 나이인 마흔에 두 번의 상을 치른 것이다.   

   

‘그때의 엄마는 큰 지붕 같았는데 엄마의 김치찌개 얻어먹는 나와 갑인 나이였다니 고작 마흔이셨다니’  

   

엄마가 떠 준 그릇에 김치반 고기반이 담겼다. 시쿰한 김치와 얼큰한 간이 밴 야들한 돼지고기 숟가락 가득 입에 넣으니 마흔의 나이는 잊혀지고 열여섯 여중생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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