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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by 시인 화가 김낙필


세월이 더디 가게 해 주십시오

눈도 어둡지 않게 해 주시고

이빨도 성히 씹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강아지풀처럼 여리더라도 굽지 않고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같은 한평생인데

어느 동네는 전란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어느 동네는 소돔의 도시처럼 환락의 밤을 보낸다

그러니 잘 태어나야 한다

동네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존립하니까


달력이 이제 두 장 남았다

장 모두가 구겨져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인쇄소는 다시 바쁘다

새 세월을 찍어내야 하니까

새 천년은 맞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훌쩍 지나갔다


눈도 어둡고

말솜씨도 어눌해지고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진다

세월의 무게는 한치의 어김도 없이 담벼락처럼 돌을 쌓아간다

올해는 단풍이 더 붉다는데

눈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다

보리 풍년이나 들게


세월에 떠밀려 바람처럼 왔지만

지금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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