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더디 가게 해 주십시오
눈도 어둡지 않게 해 주시고
이빨도 성히 씹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강아지풀처럼 여리더라도 굽지 않고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같은 한평생인데
어느 동네는 전란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어느 동네는 소돔의 도시처럼 환락의 밤을 보낸다
그러니 잘 태어나야 한다
동네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존립하니까
달력이 이제 두 장 남았다
열 장 모두가 구겨져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인쇄소는 다시 바쁘다
새 세월을 찍어내야 하니까
새 천년은 맞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훌쩍 지나갔다
눈도 어둡고
말솜씨도 어눌해지고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진다
세월의 무게는 한치의 어김도 없이 담벼락처럼 돌을 쌓아간다
올해는 단풍이 더 붉다는데
눈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다
보리 풍년이나 들게
세월에 떠밀려 바람처럼 왔지만
지금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