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섬 16

by 시인 화가 김낙필





금요일 오후 수연은
'하네다' 공항에서 나고야發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남는 시간에 서울로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귀찮은 부탁만 드린 선영 아줌마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였다
"선영 아줌마 저 예요 수연이ᆢ"
"예, 아.. 그래 수연아 반갑다 잘 있었니?"
"나고야 집은 어때? 엄마가 없어 많이 쓸쓸하지?"
"네ᆢ주말에는 별일 없으면 꼭 내려가서 청소도 하고 엄마 생각하며 쉬다 오고 그래요"
"그동안 귀찮은 부탁 잘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그 정도야 뭐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ᆢ시립 도서관이야 자료 보러 자주 가니까 어렵지도 않았고 그리고 정 선생님과는 한 동네에 살았으니까ᆢ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분 그림 수업에 오랫동안 참여했으니 그분 동선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선생님 그림 수업반 총무였잖니 내가..ㅎㅎ"
"한 동네니까 잘 가시는 찻집이나 좋아하시는 음식 등등..

도서관은 수업 끝나는 수요일 오후에는 꼭 가셨거든"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많이 놀랐고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셔
그래. 수연아 언제 한국 오면 한번 만나서 못다 한 얘기 하기로 하고 끊어야겠다"
"애들 아빠 퇴근하고 들어왔나 봐.."
"씻을 동안 저녁 차려야 하니까 알았지?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
"그리고 이제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해야지ᆢ"
"네ᆢ아줌마 그동안 너무 수고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래 알았어 다시 통화하자 이만 끊는다ᆢ"
선영 아줌마는 서울 사는 엄마의 유일한 여교 동창생이며 절친한 친구였다
시완 선생님과는 중앙동 같은 아파트에 살고 문화센터 수업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수채화를 오랫동안 배워 온 제자였다
엄마는 선영 아줌마를 통해서도 선생님의 근황을 자주 묻고 궁금한 사항을 알아봤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나 출판 기념회도 정보를 서로 공유하며 서울로 날아가 함께 참석하곤 했단다
수연은 선영 아줌마와 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저녁 비행기로 엄마 아빠를 만나러 나고야 집에 가는 길이다
이번 주말 메뉴는 한국식 닭볶음탕에 인삼 닭백숙이다
볶음탕은 시완 아빠가 좋아하고 닭백숙은 엄마가 좋아하는 한국 토종 음식이다
지난주에 담가둔 파김치도 얼추 익어서 맛있어졌을 거다
한국음식 재료 가계에서 구입한 서울 막걸리도 두어 병 준비할 참이다
두 분의 북유럽 여행 전에 식구끼리 함께하는 만찬이다
그리고 오늘은 물어봐야 할 중요한 사항의 질문이 있다
내가 두 분과 함께하는 현재 일상과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가상 세계인지..
나는 두 분처럼 자유로운 영혼인지, 아니면 살아 숨 쉬는 영혼이 맞는지..
아니면 영원한 삶을 사는 영매인지 누구인지 우린 어떤 관계인지 묻고 싶고 그리고 알고 싶다
나는 두 분 사이에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누구인가요...

선영은 모처럼 수요일 오후 도서관 열람실을 찾았다
자주 펴보던 "당신의 아주 먼 섬" 173쪽에 자신이 써넣은 쪽지를 이제는 빼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800번 현대소설 부스를 찾았다
그런데 늘 꽂혀있던 서고 813.7칸에 있어야 할 그 책이 없었다
누군가 대출해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들리기로 작정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안내 데스크 옆 반납된 책들 속에 내가 찾던 그 책이 얼핏 보였다
달려가 얼른 가지고 와서 열람실 구석 의자에 앉아 책자의 173쪽을 열어 보았다
아~그런데 자신이 메모한 3M 노란 메모지는 간 곳 없고
대신 하얀 한지 모양의 메모지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세필 붓으로 곱게 내려쓴 '캘리 글씨'체 글씨였다
"샘ᆢ드디어 우린 만나나 봐요, 함께 '삼척' 가고 싶어요
나고야發 18일 20시에 인천공항 도착 예요 입국장에서 뵈어요
S.Y.KIMᆢ"
순간 선영의 손에 온 힘이 풀리면서 책이 스르르 손에서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요한 도서관 열람실에 책 떨군 소리가 마치 비행기 추락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책갈피에 끼어있던 한지 종이가
창틈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을 받으며 하늘하늘 흰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건 분명 하얀 나비였다...

다음 달 18일부터 쿠알라룸푸르 "KR tower" 갤러리에서 "정시완" 선생님의 아시아 초대작가 유고전이 열린다
유화 40여 점이 홀에 걸린다
수연은 서울 선영 아줌마와 그곳에서 만나서 함께 가기로 했다
엄마도 물론 오시겠지......


한 달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시완의 유고전은 아쉽게도 현지의 평단과 갤러리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소재와 색감 자체가 어두운 톤이라서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좀 어려웠고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겁고 침울했다
화려하고 극 사실적인 화풍을 좋아하는 요즘 트렌드에 전혀 맞지 않았다고 평단들은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전시작품 모두가 완판 된 것이다
갤러리들은 모두 환호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판이라니?
갤러리 개장이래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 놀라워했다
또 놀라운 일은 구매자 한 사람이 그 모든 작품 전부를 일괄 구입했다는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는 뉴욕 어느 한인 재력가가 작품 전량을 모두 구매해 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밝히는 것을 거부했고
S.Y. K라는 이니셜만 전시장 방명록에 남겼단다
판매대금 40만 불은 시완의 상속인 詩人 정시우氏에게 돌아갔다
그는 시완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 사진작가 태우氏는 8년 전 "미얀마" 정글 탐사 중 안타깝게도 행방불명됐다

그런데 그
SᆢYᆢK 는 누구인가......

"연수 씨ᆢ나고야 외곽고속도로에서
차가 전복되던 날 당신 어디 가던 길 이었어요?"ᆢ 시완이 물었다
"아~날아오르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날 새벽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서울 친구로부터 들었어요

너무 허무하고 참담했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멀고 먼 선생님의 섬으로 함께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만나 함께 있잖아요ᆢ^^ᆢ"


성철 스님은 입적하실 때

"나는 죄가 많아 지옥으로 간다" 하셨다

평생 구도의 길을 가시던 큰 스님이

스스로 지옥불을 자청한 까닭이 무엇일까

곰곰이 곱씹어 본다

그렇다면 나도 지옥 가야 맞다

극락 갈 놈 하나 없다

스스로 낮춰 낮게 낮게 흐르는 물처럼 겸허하게 산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분의 겸손함에 머리가 숙여진다

높으신 분은 항상 낮은 곳에 임하신다

나는 오늘도 길을 간다

정처 없는 길이다

떠나온 길이 너무 멀어 돌아가지 못하고

그저 내일로 내일로 갈 뿐이다

먼바다 끝에서 만날 어떤 조우를 기대하면서

큰 스님 말씀은

지옥이 극락이고

극락이 지옥이라는 것

만사는 제 마음 쓰기에 달렸다는 일침

낮게 더 낮게 흐르며 가야지

그렇게 스며들면 큰 바다를 만날 테니까




일 년쯤은 낭도 해변에 살다가

일 년쯤은 앙코르왓 사원 앞에 살다가

일 년쯤은 인레호수 옆에 살다가

일 년쯤은 은비령 눈 골짜기에 살다가

일 년쯤은 나짱에서 옥빛 바다 보고 살다가

일 년쯤은 청학동 대숲 바람으로 살다가

일 년쯤은 남해 벽화마을에서 살다가

일 년쯤은 비진도에서

일 년쯤은 삿포로에서

보름도, 금오열도에서

고도에서

방파제에서

말미잘처럼 살다가

......

섬 숲에

노을처럼 눕고 싶다

.

.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
나를 잊어도 좋고 몰라도 좋다
삼척해변 민박집에서 새벽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존함을 알았다
먼동이 틀 때 무상함을 알았다
굽이굽이 해안선을 달리며
세상의 아침을 다시 보았다
죽어도 좋았을 것을 살아있어 더 아리다
너를 찾아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도 먼데
부디 나무처럼 바위처럼 한 곳에 있어주렴
내가 평생을 찾아가기 쉽도록
그렇게 말이다ᆢ

.

.

......<完>


《後

우리가 사는 세상이 今世인지 이승인지 우리조차 알 길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늘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존재 여부 다
당신의 머나먼 섬은 어디인가
내가 있는 이곳이 그 섬이다
우리가 아는 수연과 시완과 연수는 동일 인물 일지도 모른다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에 유효기간이란 것이 없다
今世에는 영원한 사랑이 존재할 수 없지만
영혼들의 세상에서의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우리는 영원히 영원한 사랑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 다시 만나도 이승에서의 우린

모두 고독한 섬일 뿐이다...


그동안 허술하고 부족한 글 <나고야 女子>를 끝까지 읽어준

독자분들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ᆢ

읽으신 글 감상평을 댓글로 좀 남겨주시면 제게 큰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2019 년 가을, 과천 부림동 주공아파트
골방에서 <자작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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