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지 않는 끝
설명하고 해답하는 일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경험하고 기술하는 일만이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은 뛰어난 안목을 가진 무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중국인 소설가 위화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책을 손에 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책들이 그의 문학적 재능을 길러주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마지막 장의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에 수 십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결말이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말이다.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었는가는 그가 가진 경험과 상상력, 지력의 한계에 달려 있다. 생각의 깊이라기보다는 다양성과 경험치의 총량에 달려 있다. 그동안 본인의 선호에 따라 발달시켜온 전체이자 탐험해온 우주이다.
기술(記述)한다. 이것이 부조리한 사고의 최후의 야망이다. 과학도 또한 그 역설의 끝에 도달하면 설명이나 해답의 제시는 그만두고 멈추어 서서 모든 현상의 늘 신선한 풍경을 주시하며 기술한다. 이리하여 세계의 갖가지의 모습을 앞에 했을 때, 우리들을 황홀케 하는 저 감동의 세계의 깊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고 세계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심정은 배우는 것이다. 설명은 공허하다. 그러나 감각은 남는다.
한 생에 얼마나 웅장한 감각의 제국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안팎의 공기의 온도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초여름 밤, 쌓아올린 모래성을 무너뜨리며 즐거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