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풍랑주의보와 서핑
비 소식이 들리면 보통 바닷가 여행은 취소된다. 지난주처럼 태풍 예보라도 있는 날이면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어렵게 잡은 휴가 일정 내내 비만 내린다면 얼마나 실망하게 될까. 그런 생각 때문에 애써 잡은 숙소와 일정을 포기하는 듯하다. 느긋한 시간을 즐길 주말은 자주 오지 않으니 한 번 한 번이 망치면 안 되는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별장이 생기면서 바닷가여행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게 되었다. 시간이 될 때 하룻밤 잠이나 푹 자고 오자 생각하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이 없어졌다.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금요일 밤 양양으로 출발했다.
예상 밖에 가평 휴게소는 사람들로 붐볐다. 젊은 커플도 있었고, 애견과 함께 온 이들도 있었고, 나이 든 엄마나 할머니랑 손잡고 온 딸들이 많았다. 메뉴는 우동과 라면, 육개장. 가평의 명물 잣이 들어간 비빔밥도 인기였다. 주문한 라면과 밥을 기다리면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과 한주간의 바빴던 사건사고 뉴스를 남의 나라 일처럼 구경했다. 뜨거운 국물에 뱃속이 덥혀지고, 홈런볼과 치토스 물 한 병을 사서 차로 돌아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아파트에 도착해 텔레비전을 틀고 소파에 드러 누웠다. 귤을 까먹으면서 한 종편 방송국에서 새로 시작한 예능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핑클 멤버가 다 같이 모여서 캠핑을 가는 내용이었다. 캠핑카와 빼곡한 캠핑용품, 자연의 풍경을 찍은 드론 영상을 쭉 보면서 협찬 받기 편했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별장 앞 바닷가에도 저런 캠핑카를 끌고 온 사람들이 잔뜩이다. 어쨌든 부지런히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들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강원도 아침 뉴스에 오후 늦게까지 비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꿉꿉한 습기를 없애기 위해 보일러를 틀었다. 빨래한 수건과 이불이 언제나 마를까 걱정했지만 뜨뜻해진 마룻바닥에 노곤해지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어젯밤에 못 다 먹은 홈런볼과 귤을 까먹으며 뜨거운 차 한 잔을 끓였다. 비발디의 사계 공연 실황을 틀어두고 빗소리를 들었다. 역시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느즈막히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하이 타이드(High tide). ‘만조’라는 뜻의 태국음식점을 찾았다. 눅진한 카레가 먹고 싶었다. 탱글탱글한 새우 스무마리가 들어갔다는 푸팟퐁커리와 치킨팟타이에 창 맥주를 시켰다. 몸에 기운이 도는 것 같은 맛이었다. 식당 벽에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남자가 상어에게 물리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천장은 검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고, 코코넛과 드림캐쳐, 각종 보드로 실내를 꾸몄다. 밥을 먹고 나온 죽도 거리에 ‘써핑’의 명소라는 동네 플랜카드가 웃겨 사진을 찍으려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다됐다.
비는 아까부터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굵어졌다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는 비는 그냥 맞고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두 달 전에 산 서핑보드를 드디어 찾으러 갔다. 죽도 해변의 용품샵에 들러 수영복을 샀다. 다음주부터 수영장에 다녀볼 생각이다. 아이오닉 뒷자리를 눕혀 보드를 싣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물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새로 산 수영복 때문에 마음이 동했지만 바람이 차가워 결국엔 두꺼운 수트를 입어야했다.
기사문 바닷가는 검은 물개들 천지였다. 서핑 강습을 받으러 멀리서 찾아온 여행객들이 해변을 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물은 반은 파도고 반은 서핑보드와 거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즌이 되면 사람들이 몰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태풍이 오는 날도 이럴 줄은 몰랐다. 각자의 서핑샵 로고가 그려진 보드와 수트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강습 시간마다 정해진 강사 한 명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파도는 왕창 깨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출렁였다. 아수라장이었다.
비가 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바람이 사방에서 불면서 파도도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먼 바다에는 선수들만 나가 있고,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위험 수역은 들어가지 못하게 줄을 쳐놨다. 그래도 끌려들어가는 사람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생기고 해변가에서는 경고성 호루라기를 부는 안전요원이 분주했다. 서핑샵 사장님들도 지쳐 보였다. 한겨울에 난로 앞에 늘어져 있던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 정신없는 모습이 웃겨 이죽이죽 웃으며 인사를 하게 됐다. 강습생들을 자신의 보드를 간수하느라 바빴다. 보드 위에 아슬하게 서서 해변가까지 오긴 왔는데 마지막에 거꾸러져 물을 먹었다.
풍랑주의보와 함께하는 서핑은 욕과 웃음이 번갈아 터지는 것이었다. 내동냉이쳐졌다가 다른 사람들의 보드에 맞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순간이 계속됐다. 한 타임, 두 타임. 지친 사람들이 해변가로 빠지면서 바다에 보드보다 파도의 면적이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물을 먹고, 파도에 맞으면서 다시 라인업까지 헤엄쳐 나갔다. 밀려 났다 밀고 나가는 가운에 양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파도에 올라탔다 싶으면 신나서 웃다가 바다에 빠지면서 물을 한웅큼 마신다. 침을 뱉고, 손으로 쓸어내고, 물로 닦아도 짠맛이 가시지 않는다.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더 이상 거슬리지 않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몇 시간이 흘러있었다.
오랜만에 서핑으로 운동이 되었다. 샵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와 카프리를 한 병 시원하게 마셨다. 저녁으로 먹은 휴게소 떡라면은 달았고, 배가 적당히 부르자 양팔과 허리가 뻐근해졌다. 엄지네 포장마차에 들러 꼬막 비빔밥을 사 고속도로에 올랐다. 오는 길엔 정신을 못 차리고 내처 잤다. 정신이 충만한 육체적 피곤함에 온몸을 맡기고 죽은 듯이 자면서 올라왔다. 지난 일 년 동안 뿌리를 키우고 이파리를 키운 몬스테라를 한 뿌리 떼어 서울 집에 데려왔다. 양양과 서울을 오가며, 잘 먹고 잘 쉬고 잘 크고 있는 나와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