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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Apr 16. 2016

THE SEWOL 5000만 가지 이야기

김동률, 루시드폴, 언니네 이발관 그리고 나와 당신



 침묵이 부끄러워 부르는 이 노래로/
 잠시 너를 쉬게 할 수 있다면        

- 김동률, <동행> 2014.10.01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루시드 폴, <아직, 있다> 2015.12.15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아.
내가 살아가고 싶은 곳/ 누구도 포기 않는 곳. 한 사람도/ 그런 곳을 꿈꾸네        

- 언니네 이발관. <혼자 추는 춤> 2015.12.17


 언니네 이발관, 루시드 폴, 김동률. 이 셋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정답은 2014년 4월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참사가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0월 중순에 나는 김동률의 새 앨범을 선물 받았다. 마지막 10번 트랙에 들어 있던 <동행>을 들으면서 시간이 멈춰 되돌아 가는 것을 느꼈다.     


@ 김동률 <동행>


‘넌 울고 있었고 난 무력했지. 슬픔을 보듬기엔 내가 너무 작아서. 그런 널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던 건 함께 울어 주기/ 그걸로 너는 충분하다고 애써 참 고맙다고 내게 말해주지만. 억지로 괜찮은 척 웃음 짓는 널 위해 난 뭘 할 수 있을까..’(김동률 <동행>)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그 날 저녁, 루시드 폴 신곡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상에 앉아있기 지겨워질 때 <아직, 있다>를 찾아들었다.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루시드 폴 <아직, 있다>)’ 자정이 가까워진 한밤중에 시간이 또다시 멈춰 나를 되돌아가고 있었다.     


@ 루시드 폴 <아직, 있다>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1년 반 동안 나 자신도 잊어버리고 있던 상처를 걱정해주는 목소리였다. 난생처음 듣는 노래인데 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혼자서 한참 울었다.


 그리고 이번 봄엔 분위기가 다른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언니네 이발관의 싱글 앨범 두 곡을 번갈아 들었다. 앞의 두 노래와 달리 전자음이 섞여 차가운 느낌의 노래들이었다. ‘왜 이따 위니 세상이/ 그지. 그래서 뭐 난 행복해’ ‘난 아무것도 아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그저 하루하루 견딜 뿐이야.’ 조금 시크한 가사말들 사이로 툭툭 무심하게 들려오는 한 줄의 가사 속에 ‘의미 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아가 있었다.

@ 언니네 이발관  <혼자 추는 춤>

 따뜻하고 슬픈 목소리가 아니지만 여기 그 날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가 있다. 누구를 위로하려 들지 않아도, ‘매일 혼자 춤을 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의미 없이 숨 쉬는' 한 마디로 한심한 나지만 아직 그 날을 기억하고 있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신나는 리듬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누가 어깨를 붙잡아 세운 듯 발걸음이 멈춰지는 때가 있다.   


 세 명의 다른 가수, 서로 다른 장르의 노래가 같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노래들을 들을 때마다 새로워지고, 손에 잡힐 듯한 생명력을 얻는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 서로 다른 기억이 새겨지고 때마다 떠오를 것이다. 5000만의 국민들이 ‘세월호’에 대한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되었고, 한 곡의 노래를 통해 그것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그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준 일이 그래서 나는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여기 5000만 개 가운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2014년 4월 나도 진도에 내려갔다.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그곳에는 의사, 군인, 기자, 자원봉사자가 넘쳤다. 전국 각지에서 온 구호물품으로 신발, 옷, 음식, 약품, 세면도구, 담요 모든 것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공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돈이 가장 의미 없는 물건이었다. 의사가 있어도, 군인이 있어도, 기자와 카메라맨이 있어도. 치료해줄 '사람'이, 지켜줄 '사람'이, 목소리를 들려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상자가 아닌 시신만 올라오는 상황에서 어떤 전문 인력도 그저 ‘사람 짐’밖에 되지 않았다.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 없는 가치. 우리가 진정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만큼 분명히 보이던 때가 없었다. 돈과 권력, 명예는 제일 나중의 것이었다. 자식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부모는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군인들의 서열을 받으며 시신이 헬기로 수송되었다. 아직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그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식의 학생증 사진을 목에 걸고서 식사를 하러 나온 부모 앞에서 고개가 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와 가슴이 얼어붙는 순간순간에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호되게 가르침을 받는 느낌이었다.     

@ 진도 체육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이 자원봉사하는 청년들을 더 많이 걱정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체육관 계단에서 자는 그들을 위해 담요를 가져다주고, 자신의 아이는 아직 바닷속에 있는데 우리가 잠을 못 자는 것을 걱정해주었다. 그들 중 태반은 하루라도 생업을 놓을 수 없는 이들이라는 게 한 눈에 보였는데, 자식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오히려 봉사자들을 위하는 모습에 말할 수 없는 죄송함을 느꼈다. 서울에 올라와 유가족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당혹스런 얼굴을 보여줄지라도 원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2014년 4월 사건 당시 그들은 누구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다. 무언가 변했다면 무언가에 의해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눈으로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곳은 침묵으로 고요했고, 모두 이 기다림의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다주는 사람은 없었다. 체육관 앞에서 배식을 준비하고 노란 리본을 만들면서도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적어도 유가족들에게는 진행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고 있겠지. 수 백 명의 목숨이 걸린 일에 국가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가만히 있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 기관을 전문가를, 언론을 너무 믿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총력을 다해 구조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누군가가 제대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맞는지. 누군가 알려주길 기다리기보다 따져 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후회가 더해진다. 처음에는 그저 슬픔이었던 것이 죄책감과 무력감으로, 이제는 후회로 남아 있다. 다음에는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더 많이 질문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아트 슈피겔만의 《: 한 생존자의 이야기 (Maus: A Survivor's Tale)》,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그리고 『안네 프랑크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정답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이다. 한 편의 소설, 한 권의 만화, 그리고 한 편의 영화.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모여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자꾸만 70년 전 그 날로, 그 날로 되돌리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결과, 피해자와 가해자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실제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영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서로 다른 기억과 생각을 거쳐 각색된 이야기일지라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해자의 잘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5000만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워도 쉽게 잊는 이유는 그것을 ‘나의 역사’, ‘살아있는 역사’로 배우지 못해서이다. 똑같은 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이야기로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서로 모양이 다를수록 역설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할수록 역사는 더 입체적이고 완결된 서사로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20년, 50년이 흘러도 5천만 국민과 세계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고통의 역사에 대한 통일된 목소리를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다. 다시는 고통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고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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