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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말스런 여자 Dec 13. 2022

22년 한 해를 보내며

늘 똑같은 패턴으로 맞이하는 하루하루의 삶은 내 인생이 아니다. 그럼 내 인생이 아니면 누구 인생이란 말인가? 내 인생이라면 적어도 나의 통제하에 내 임의대로 사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도통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니 해보는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떴다. 마치 어느 누가 보이지도 않는 리모컨으로 나를 컨트롤하는 것만 같으니. '그만 일어나거라' 하는 터치에 눈을 뜨는 것 같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예정된 시간에 맞춰서 긴 잠에서 깨어나듯이 말이다.


그리고 난 깨어난 뒤에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금방 돌아오지 못한 채, 게슴츠레한 실눈으로 몽롱한 상태로 한참이나 헤맨다. 내 맑은 의식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늘 비슷한 패턴이다.


간밤에 잠자는 시간은 누군지도 모를 이가 나를 점유한 채 방치된 시간은 내 삶 같지 않은 시간인 것이다. 그냥 잠자는 시간이라고 쿨하게 인정하는데 인색한 표가 두드러지게 나지만, 내 의식이 사라진 시간들이어서 그럴까. 이런 시간들이 우리 인생의 거의 3/1을 차지하고 있다. 난 3/2밖에 살지 못한 거다. 내 의식이 있는 시간은 이 기간뿐이었으니까.


그럼 눈 뜬 시간만이라도 난 내 삶을 잘 살았을까? 그것도 아니긴 매한가지다. 내 뜻대로 하는 삶들도 있지만,  늘 자의보다는 태반이 세상의 관습이나 풍습, 통념이나 법의 잣대에 따라 억지 춘향이처럼 춤을 춘 시간들이니. 이런 억지 춤은 춤이지만 춤 같지가 않다. 마치 사람들이 상술로 이용하는 상점 앞에 커다란 키다리 풍선처럼. 이 풍선 인형에 바람 잔뜩 집어넣어 두 팔이 반복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그래, 몸통이 흔들리고 제 자리에 매여서 두 팔만 휘젓는다고 해서 진정한 춤은 아니다.


춤은 산 자가 춰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의 움직임인 이동도 있어야 맛이 난다. 멋들어진 기교가 없는 뻣뻣한 보릿대 춤이든 막춤이든 산 자가 춰야 진정한 춤이다.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인 이 거친 사내가  추는  춤이면 진정한 산 자의 춤이 될까? 최소한 가장 산 자에 가까이 다가간 자의 춤일 것은 같다. 그럼 산 자란 뭐라 말할까, 그걸 내가 시원스레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배앓이도 두통도 사라졌겠지.


딱히 철학자의 정의는 아닐지라도 내게 산 자란 뭘까? 조물주의 보냄으로 부모와의 연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와 이곳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사는 자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과 울고 웃고, 속고 속이며,  상처도 받고 다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되물려 주고.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홀기듯이. 부 (富) 하기도 하고, 빈(貧) 하기도 하는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나만의 춤을 추며 살아내는 자다.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날들은 동시에 한편으론 또 어딘가로 다시 사라지는,  살 날이 줄어드는  날들이기도 하다. 산다는 건 잠에서 막 깨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몽롱하게 반 의식 상태로 사는 날들일까? 하여, 의식이 몽롱하니 살다보면 실수도 실패도 할 수밖에 없는 필수 과정의 길을 걷는 삶. 현재 아직은 나도 생물학적으론 산 자이다. 그런데 여전히 산 자라는 느낌이 불충분하지만 어쩌랴!


그럼에도 눈을 뜬 오늘 아침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이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알 수 없을 당신이겠지만, 난 삶이란 신비하게 마법처럼 펼쳐지는 날들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펼쳐지는 영극 (影劇) 같은 무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멋대로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그래서 내 인생에 거의 3/1을 차지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나에게 세상을 버텨낼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과 같은 시간들일 거라고.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가 긴 잠에서 깨어나 네이티리와 운명처럼 만나 "I see  you"라고 인사하듯이. Na'vi 족인 그들만의 인사법처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바라보듯이. 그 3/1인 시간은 단순히 육신의 회복만이 다가 아닌, 그저 빛과 어둠이 반복적으로 교체되는 것만이 다가 아닌, 잃어버린 내 영혼이 돌아오는 최고의  침묵의 시간들일 것이다.

22.12.10일 오후  이쁜 친구집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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