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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말스런 여자 Dec 25. 2022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진정 난 몰랐네

22년 12월 25일 10시

(동창들 카톡방에 올렸던 글)


메리 크리스마스!

내게 성탄절의 추억을 더듬으면 까마득히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딱히  몇 살인지도 모른다. 취학 전인 것도 같고. 동네 아이들 따라서 처음 발 디뎌본  교회였다. 기억에 남는 건 지금은 그게 예배라는 걸  알지만, 예배가 끝나고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빵 한 개씩을 나눠 줬다. 차례대로 줄 서서 주는 것도 아니고 손 내미는  아이들에게 주다 보니 순식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고 난 그 틈에서 뻘쭘하니 서 있다가 빵은 금세 동이 났다. 이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 내 최초의  크리스머스 추억이다.

그리고 난  종종 살아가면서 이때가 떠오른다. 난 왜  다른 아이들처럼 적극적으로 나도 달라고 손 내밀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자 아쉬움? 아마도 그게 타고난 내 소심함인 건지, 난 평생을 그때 그 방식으로 살아버린 느낌이 떨궈지지 않는다.


제2탄 스토리.


아, 그러고 나서 언젠가부터 난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한테 투정 부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뭐라고요?" ,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고요"라는 복음성가 가사를 난 들이밀었다. 작은 신음은커녕 당신은 바위 같은 고통에도 끄떡도 안 하시던데요.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힘들고 지친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요? "당신은 그때도 제게 빵 한쪽도 안 줬잖아요, " 하고 사는 게 힘들어지면 난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다. 지나고 보니 이렇게 살아낸 것이 다 그분의 사랑이었다고, 이제는  누가 뭐래도 거침없이 헤픈 여자가 되어 당신께 내 사랑도 고백하네요.


22년 12월  2일 월드컵 개막 전


(  12월 동창 모임에 참석 여부 번호표들 다는 걸 보면서 동창들 카톡방에  월드컵에 대해 올린 글)


다들 주렁주렁 번호표들 잘 다네. 부럽당. 난 허여멀건 흰 죽에 새우젓국만 어제오늘 먹고도  그래도 이마트를 방금 다녀왔다. 이래 아프나, 저래 아프나 이판사판이다. 오늘 저녁 마지막 혈전을 응원하기 위해서. 지난 두 번 시합 때는 큰 아들이 먹거리를 다 준비해서 오늘은 엄마가 하겠다고 했거든 그 넘도 요즘 힘드니까. (화물 연대 파업으로 퇴근길의 어려움). 내가 준비한 진짜 이유는 또 있다. 무신 기운 있다고 내가 tv 앞에 앉아 대한민국 ~~ 하고 있겠나. 애미는 빌빌거려도 우리 집 일등 머슴(작은 아들 별칭)은 에너지가 남아도는지 대한민국 일등 머슴이 되어 카타르로 날아갔다. 거기까지 응원 간 아들 생각하면 난 이까짓 것도 못할까 싶어서다.


요즘 장이 안 좋으니 이것저것 나는 먹지도 못할 회거리를 잔뜩 낑낑대며 사 왔으니, 바닥난 체력은 당근 머리골이 빠개진다. 이제 tv 앞에 앉아 열심히 대한민국 응원하며  행여나, 혹시나  우리 집 일등 머슴도 화면에 잡히려나? 기대해 보지만, 그런데 그럴 확률이 당최 없을 것 같다.


뭔가 응원도 열심이고 복장이나 얼굴도 특색이 있어야 화면에 잡혀서 "오메, 우리 집 머슴 나왔네"  하고 좋아할 텐데. 이 녀석 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응원객들 중에 제일 잖은  넘이 있다면 그 넘이 내 아들이니까. 어렸을 때 유치원 발표 행사에 갔더니 다른 모든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다들 따라 하는데 이 넘은 正자로 뻣뻣이 서 있더라. 나중에 집에 와서 넌 왜 선생님 따라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이 넘 왈, "엄마,  남자는 그렇게 까부는 게 아니야"라고 한다. 기도 안 찼다.


아니 여섯 살 퍼먹은 꼬맹이 놈이 지는 남자란다. 그래, 남자지  여자겠나! 맞는 말이긴 하다마는. 하여 그리 방정맞게 안 논다니. 맞다, 맞아! 내 두통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됐는지도. 암튼 응원도 하고 일 잘하면서 점잖기까지 한 우리 집 머슴도 화면에 잡히길 기다려도 보고. 식구들과 즐거운 한 때도 갖다 보면 두통도 사라지고 나도 동창회에 참석한다는 번호표 달지 누가 아나.



22년 12월 25일 17시


진정 몰랐네.

여섯 살 먹은 아들의 모습이나, 그 나이였을 무렵의 크리스마스날의 내 모습이 이리 딱 들어맞게 오버랩될 줄을.  월드컵 경기를 기다리며 그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아니 오늘 아침에 글을 쓸 때까지도 난 그 아이의 모습이 내 모습이었던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는 남자여서 그렇게 안 까분다는 거나,  뭔지 모르지만 빵 하나 받겠다고 손 내밀지 못한 어린시절 그때의 모습이나 상황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의 시간 차는 있어도, 그 또래 아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고 뻘쭘하니 서 있던 이 모자의 특성은 너무 똑같았다. 30여 년 전 그 아이의 특성은 절대 내 모습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수말스런 여자와 일등 머슴은 이리 판박이로 한통속이라니, 쩝쩝, 할 말이 없다. 내가 어린 시절의 그 방식으로 평생을 살아버린 것처럼, 지금 내 아들도 딱 그  어릴 때의 로 살아가고 있는 걸 본다.


꽃게가 본인은 옆으로 걸으면서 새끼한테는 옆으로 걷지 말고 반듯이 똑바로 걸으라고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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