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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말스런 여자 Jun 17. 2021

 지랄 총량의 법칙 2

 지금 지랄 총량의 법칙을 채우고 있을까?

언젠가 지랄 총량의 법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떨어야 할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이 법칙을 조금 더 확대한다면 인간이 웃어야 할 양도, 울어야 할 양도, 행복해야 할 양도, 고생해야 할 양도, 고통의 양도... 일정 부분 겪을 건 겪고 누려야 할 건 누려야 할 것 같은 것.


우린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 일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불행만이 전부인 인생도 없을 것 같고, 꽃길만 걷는 장밋빛 인생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모임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불행이나 힘듦도 겪어보지 않았고, 고생도 해본 적 없고, 자식 셋도 다 잘 되고. 자식 때문에 속 썩어본 도 없단다. 또 남들에게 자신이 번 돈을 베풀며 아름답게 살아가니 트집 잡을 것도 없는 이쁜 인생이라고. 참 부럽고 복 받은 삶이랄 수밖에. 런데 이 지인이 하는 말. 이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면 '맥 빠져'라고 한다. 힘듦과 실패를 보지 않아서  인지 말이 공감대가 안 통하니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것이다.


그래, 딱히 이제 와서  그런 삶이 부러울 것도 없지만 이런 인생도 있구나 싶긴 하다. 요즘에 은발을 변장하고 일을 하다 보니 '나도 아직  치르지 못한  고생의 양이 남아 있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시원하기도 하고. 하늘에 떳떳해서. 잘 살고 못 살고는 하늘에 맡길지라도 열심히 노력이라도 해봤다는 자체로 좋은 것 같다. 이 나이에 일한 다는 건 경제적 보상과 세상 속에 부대끼며 섞여 있다는 만족도 있지만,  누가 들으면 철딱서니 없는 삶일지라도 나이가 말해주는 고단함이 제일 버겁게 느껴진다.


마음은 즐겁다. 도심이 아닌 변두리로 출퇴근하는 맛이 일품이다. 지겨운 빌딩 숲이 아니라 북한산을 바라보고 교외로 달리며 바라보는 풍경은 눈에 넣어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단지  내 힘에 부치면 주변 식구들에게 시비를 걸고 투덜댄다.  그래서 나름 조율하여  일의 양을 줄이기로 했다.  오늘은 쉬는 날. 하여 따끈따끈한 매트에 누워, 지친 삭신을 풀어내고 있다. 이 육신이 얼마나 지랄 총량의 법칙에 따라 고생의 양이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이젠 안다.

이러고 사는 것이 인생이란 걸. 더 이상 장밋빛 인생이란 별 의미 없으리라.


브런치 앱에서 어떤 작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작가가 여행지에서 겪은 일이었다. 어느 사막에서 버려진 낙타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떠돌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썼다. 낙타가 현대문명의 이기에  밀린 건지, 여행객 감소 탓인지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낙타가 길들여지긴 위해선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고 들었다. 낙타는 처음에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걸 싫어해서 반항할 때마다 쇠꼬챙이 같은 기구로 때리고 찌른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낙타를 길들여 놓으면 아무리 무거운 짐을 등에 올려놓아도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간단다. 마지막  힘이 다해 다리가 꺾여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이게 낙타의 운명이란다. 무슨 저런 가혹한 운명이  있나 싶어서 낙타만 생각하면 참 안쓰러웠다. 런데 그러고 살 때가 행복이라니, 무슨 이런 아이러니가! 아니면 저렇게 사막을 헤매다 굶주려 죽는다니 기가 막힌다.


그 작가가 하는 말이 자신도 이 세상에서 팽 당하지 않으려고, 오늘도 출퇴근 지하철 계단을 몇 개씩 건너뛰며 열심히 살아간단다. 이 힘듦이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21년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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