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들깨 밭

시골살이에서 만난 사연

by 바람마냥

산골에 위치한 집 앞엔, 작은 도랑이 있고 그 너무엔 나지막한 산 자락이 펼쳐진다. 도랑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며 여기가 '도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이 작은 물이 흐른다. 도랑 그 너머 산자락엔 봄이면 나물이 지천으로 솟아나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은 초록물감을 마구 쏟아낸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여름내 하얀 꽃을 털어낸 밤나무가 붉은 밤톨을 물고 작은 바람에 그네를 타곤 한다.


밤나무가 으스대며 서 있는 곳 못미처에 비탈밭이 서너 자락 자리 잡고 있는데, 위쪽에 있는 밭은 임자가 있는 듯 없는 듯이 하얀 개망초가 하얀 꽃을 가득 피웠고, 아래쪽으론 새 산주인이 된 고라니를 되돌려 보내려고 밭 둘레에 울타리를 쳐 놓았다.


위 밭에는 하얀 개망초가 꽃을 가득 피웠고, 아래 밭에는 울타리가 처지면서 옥수수가 심어졌고, 고추와 토마토가 익어가면서 제법 그럴듯한 밭이 되었다. 밭주인은 아침마다 풋고추를 한 양재기, 토마토를 한 양재기 따서 가느다란 다리를 조심스레 넘어온다. 개꼬리가 나온 옥수수는 아직 덜 익었는지 붉은 수염을 달고 바람에 가느다란 몸을 맡기고 서 있다.


중간에 있는 제법 큰 밭에는, 언제나 허리가 굽은 할 아버지가 계신다. 비가 와도 계시고, 바람이 불어도 그리고 햇살이 아무리 비추어도 그 자리에 계신다. 비가 오면 비닐 우의를 입고, 햇살이 비추면 밀짚모자를 쓰고 그 자리를 지키신다. 허리가 굽으신 할아버지는 그 밭을 지키며 항상 푸르른 밭을 일구시고, 비탈밭에 안 계시는 날은 언제나 근처 밭에서 풀을 뽑으시곤 한다. 언제나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혹시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되기도 한다. 혹시, 편찮으시나 않으신가? 아니면 출타를 하신 걸까? 언제나 밭일로 바쁘신 아랫집 주인은 할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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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밭일은 봄철이 조금 지나고부터 시작되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서 겨울이 될때까지 할아버지는 늘 비탈밭에 계신다. 할아버지 일은 비탈밭에 나기 시작하는 풀과의 씨름하기부터 시작된다. 흔한 쟁기나 경운기를 동원해 법석을 떠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작은 호미만이 손에 쥐어져 있다. 고랑에 있는 풀을 매기 위해서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지만, 한골 한골의 풀을 뽑기 시작하면 쉬는 시간이 없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는 일도 없이 시작과 끝이 언제나 같다. 아침부터 해가 지는 시간까지 끊임없는 손놀림으로 그 밭을 예쁘고도 아름답도록 정리를 해 놓으신다.


여름이 무르익어 7월 중순이 되어 장마 비가 오고 깨를 심기 좋은 땅이 되면, 폴이 뽑아진 할아버지 밭은 점점이 푸름으로 물들기 시작된다. 작은 들깨 모종을 한 포기씩 심으며 그 넓은 비탈밭을 메워 나가신다. 오로지 호미만을 무기로 삼아 할아버지는 여름 비가 추적대는 오늘도 작은 들깨 모종을 하나씩 심고 계신다. 커다란 밭에 한 포기씩 심기 시작한 들깨는 어느 순간에 밭 전체를 채우게 되니, 밭이랑엔 점점이 푸름으로 가득히 심어지게 된다.


여름이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할아버지는 고단함을 잊은 채 풀을 뽑고 아침, 저녁으로 들깨밭을 돌보신 덕분에 점점이 푸르던 들깨밭은 푸름이 몸집을 불리면서 밭고랑마저 보이지 않게 덮었다. 어느덧 연한 녹색의 들깨는 여름 비와 바람을 이겨내고 짙은 녹색으로 물든다. 점점 몸집을 불린 들깨는 바람에 일렁이며 꽃을 피웠고, 가을이 익어 갈 무렵엔 들깨 알이 영글어간다. 비탈밭이 들깨로 가득해지면 가을이 다가왔다는 것인데 그러면 깨를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낫을 들고 밭으로 출근하신다. 한 이랑씩 깨를 베어 비탈 진 밭에 비스듬히 뉘이며 바람과 햇살에 도움을 청한다. 쉽게 깨를 털 수 있도록 바람과 햇살이 습기를 말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날을 기다려 햇살의 도움이 넉넉해지면 그 밭은 새 일꾼들이 등장하게 된다. 할아버지 혼자서는 들깨를 털고 옮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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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명의 가족인듯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넓은 비탈밭에 들깨를 수확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둘러 햇살에 말린 깨단을 펼쳐 놓고 번갈아가며 막대기로 깨단을 두드린다. 한 톨이라도 튀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 넓게 펼쳐놓은 비닐이지만 원래 비탈진 밭이라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털어진 들깨는 지나는 바람 힘을 빌려 먼지와 티겁지를 날려 보내고, 할아버지 일 년의 성물, 거무스름한 들깨는 자루에 정성스레 담긴다. 힘겹게 모아진 들깨는 조금은 젊은 듯한 아들이 옮기고, 들깨를 털고 난 들깨단 언덕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다. 적당이 말린 들깨단은 적당한 날을 이용해 불을 놓고 태워야 재가되고, 그 재는 밑거름이 되어 내년 들깨밭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봄부터 끊임없이 찾은 할아버지 덕에 버리진 듯한 비탈밭은 가을의 넉넉함을 한 아름 건네주고, 들깨 털이가 끝나야 봄부터 시작된 할아버지의 성스런 노고가 끝이 난다. 할아버지에게 안겨진 들깨는 방앗간의 신세를 지고 고소한 기름으로 탄생되면, 할머니가 만드시는 갖가지 반찬에 쓰일 것이다. 남은 들기름은 시집간 딸에게도 주어야 하고,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도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혼이 깃들어진 들기름은 자식들에게 전해지는 간단한 선물이 아니라, 성스런 가을걷이로 얻어지는 어르신의 거룩한 성물이며,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신성한 선물이다. 늦가을이 되어 허전해진 비탈밭은 매일 찾던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오늘도 산 아래를 굽어 보게 될 것이다. 이때나 저때나 기다리다 지친 비탈밭은 언제나 봄이 또 오려나 고대하며, 온몸으로 하얀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서두름 없이 비탈밭을 지켜왔던 거룩한 할아버지는 봄을 기다리며 기나긴 겨울로의 긴 휴식에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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