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팝나무 꽃이 필 무렵

조팝나무의 기억(우루무치, 천산천지 설산)

by 바람마냥

꽃이 만발한 모양이 튀긴 좁쌀을 붙인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조팝나무가 꽃을 피울 무렵이면, 시골 동네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 년 농사가 시작되는 일철이 들어섰다는 뜻이기도 한데, 3월의 쌀쌀한 기운이 봄바람에 물러나고, 4월의 훈훈한 바람이 찾아오게 되면 조팝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감나무 밑에 소복이 자리한 조팝나무가 자그마한 촉을 내밀고, 4월 봄바람 유혹을 못 이겨 하얀 꽃을 피우게 되는데, 소박하고도 탐스러운 꽃 덤불은 찾아온 4월을 한껏 축복하는 선물이다. 하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마치 하얀 눈을 나무 끝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소담스럽기도 하고, 푸른 잎은 나무줄기 아래쪽으로만 있어 마치 하얀 꽃으로만 이루어진 것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얀 꽃을 이고 있는 조팝나무가 한창 무성해지면, 위쪽에 위치한 감나무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면서 하늘에는 연한 연초록 물감이 쏟아지게 된다. 나무 안쪽으로 거무스레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감나무는 겨울잠을 깨우는 대지의 부름을 받고 서서히 봄기운에 꿈틀 거린다.

IMG_7088.JPG

어느새 나무를 타고 오른 물줄기는 늙수그레한 감나무를 간지르고, 못 이기는 척 근엄한 감나무는 찾아온 봄을 노래하며 줄기마다 자그마한 싹을 틔워 초록으로 치장을 한다. 두터운 줄기를 비집고 나온 작은 새싹은 따사로운 봄 햇살에 이슬에 젖은 몸을 말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싹을 키워 나가면 아래 덤불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감나무 밑을 흐르는 도랑에는 작은 미나리가 싹을 내밀고, 나뭇잎에 숨어 고물 대기 시작하는 올챙이도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감나무 안쪽으로 자리한 노란 매화는 어느새 줄기에 진한 녹색을 띠고, 벌써 진한 물을 흠뻑 머금었다. 며칠이 지나 노란 매화가 잎을 피울 정도의 봄이 더 오면, 그 너머에 찔레 순도 하얀 솜털 머리에 이고 꼬물 거린다. 따스한 햇살이 짙어지면 어린 찔래 순은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물들어 봄 속으로 빠져든다.


아름답게 시작된 봄 이야기는 농부의 발걸음을 바쁜 걸음으로 바뀌게 하는데, 한 해 농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벼농사를 짓기 위해 못자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지난해 준비해 둔 볍씨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울 준비를 한다. 이를 위해선 바닥이 넓어 많은 볍씨를 질펀하게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 있어야 안성맞춤이다. 뒤뜰에 하얀 먼지 쓰고 때를 기다린 커다란 대야에 물을 붓고, 정성스레 준비한 볍씨를 쏟아 넣는 소리는 풍년을 기약하는 아름다운 소리이다.

IMG_7104.JPG

뽀얀 먼지를 하늘로 내 품으며 그릇으로 쏟아진 볍씨에 물이 잠길 정도로 붓는다. 볍씨에 싹이 돋는 동안 농부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텃논에 물을 대고, 질펀한 둑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여기에 뒷산에서 고운 황토 흙을 퍼 온 후, 성근 얼기미로 정성스레 흙을 담아 자갈과 이물질을 골라낸다. 고운 황토 흙이 모아지면, 못자리를 하려 준비한 논에 황토 흙을 뿌려 못자리 준비를 마치게 된다. 준비한 못자리 터에 물이 많지도 적지도 않을 정도의 물을 찰랑찰랑하도록 댄 후, 정성스레 싹을 틔운 볍씨를 뿌린다.


물이 차올라 못자리가 자리를 잡으면, 내리쬐는 햇살을 잡아 놓고 어린싹을 보호하기 위해 비닐로 집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일이 남았다. 뒷산에 올라 한발 정도의 가느다란 나무를 다듬어 활 모양으로 휜 다음, 못자리 위에 줄을 맞춰 꽂는다. 활 모양의 나무 위에 장날 준비한 비닐을 길게 덮는데, 바람이 불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양쪽에서 서로 잡으며 흙으로 끝을 덮어야 하지만, 바람이 방해를 놓으면 바람이 자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저녁나절 바람이 쉬는 틈을 타 바람 몰래 비닐로 하얀 숲을 만들면 초봄의 못자리가 끝이 나게 된다.

IMG_E7078.JPG

못자리가 끝나면 봄바람이 심심치 않게 찾아와 비닐을 두드리며 고요한 한나절을 깨우기도 한다. 펄럭이는 바람 따라 비닐은 몸을 움츠리며 떨기도 하고, 힘차게 버티는 나무에 의지하며 나른한 봄을 즐기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도랑을 따라 기다란 원을 그리며 출렁이기도 하고, 줄넘기를 하듯 물결이 높낮이를 반복하는 유희의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 사이 언제 나타났는지 긴 다리를 가진 소금쟁이는 바람 따라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등짝이 검은 물방개는 물 위를 빠르게 돌며 사람의 정신을 사납게 한다.


물이 고인 작은 도랑엔 고물고물 한 올챙이가 여름날을 준비하며 이리저리 헤엄을 친다. 봄철 조팝나무가 꽃이 필 무렵 야단법석을 떨던 동네가 조용히 잠이 드는 듯하면, 어느새 조팝나무는 파란 잎사귀 진초록으로 흠뻑 젖어들고, 봄은 서서히 여름 곁으로 다가가게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