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Dec 15. 2020

추억의 라면, 환장할 맛이었다.

(라면의 맛과 멋)

라면, 참 맛이 있었다. 피가 끓는 청년시절, 군대에 갓 입소를 했을 적 이야기다. 하루 종일 훈련장을 오가며 녹초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때, 느닷없이 라면 냄새가 피어오른다. 내무반장이 난로에 라면을 끓여 한잔의 소주와 곁들여 피우는 냄새이다.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위대하고도 거룩하신 내무반장님은 이때 냄새를 풍겨야 했을까? 야속하고도 원망스러운 맛이었다. 이 고통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후반기 교육을 받는 시절이다. 한 개 중대가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통합막사엔 찬 바람이 잠을 자게 두지 않았다. 어둑한 불빛 아래 고단한 몸을 뉘어야 하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는다. 통합막사 곳곳에 난로가 피워져 이글거린다. 거기에 라면 냄비가 절절 끓고 있다. 얼큰한 라면 냄새는 통합막사를 골고루 다니며 허기진 청춘의 콧구멍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것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에 대한 복수를 할 기회가 되었다.


자대에 배치를 받았다. 배치를 받던 첫날, 느닷없이 계단 밑 창고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내무검사가 있는 날이라 송충이, 이등병은 보이면 안 된다는 선임병의 명에 따라 컴컴한 계단 밑 창고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첫날의 악몽이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입대 당시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사병이 많지 않았다. 대학 졸업을 한 이등병을 서로 빼앗아가려고 난리가 났다. 행정병으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행정병이란 보직을 받고 너무나 불편했다. 왜냐하면 늘, 볼펜을 잡고 손이 아프도록 글씨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면이 있었다.


언제나 늦게까지 행정일을 보아야 했다. 낮에 식당에 들러 라면을 얻어 놓는 것은 선임의 몫이었다. 늦게까지 서류 정리를 하고 언제나 라면을 끓여야 했다. 적당한 그릇이 있을 리 만무했던 군대,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두 개의 라면을 넣으면 적당했다. 꼬들꼬들한 라면이 그러게 맛이 좋았다. 그간의 라면에 대한 복수를 다 할 듯이 매일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 봉지에 덜어 먹는 라면 맛은 속을 뒤집어 놓을 듯이 맛이 있었다. 한동안 환장하면서 라면을 끓여댔다.


하지만 입맛이 그렇게 너그럽지는 않았다. 라면을 쉽게 먹을 수 있어서인지 맛이 없어졌다. 김치가 그리워졌고, 파와 계란이 생각났다. 얼마 되지 않아 라면에서 밀가루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진 모양이다. 환장하도록 맛있던 라면이 맛이 없어졌다. 라면에서 특유의 밀가루 냄새가 역겨워졌다. 라면은 먹을 것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맛이 간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사한 입을 가지고 제대를 한 이후 라면을 잘 먹지 않았다. 라면에서 밀가루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 라면을 먹어야 하는 경우에도 가까스로 몇 젓가락이 전부였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은 일 년에 몇 번에 불과할 것이다. 라면에 파를 썰어 넣고, 계란을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미식가들이 끓이는 방법으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유명한 식당에서 '라면정식'이란 이름하에 끓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면에 대한 나의 입맛은 환경이 그냥 두지 않았다. 궁한 처지가 되자 다시 입맛이 돌아오고 말았다.


스위스 융프라우에 올라 맛보았던 라면 맛은 천하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의 맛이었다. 매우면서도 시원한 그 맛을 어디 가서 다시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천하에 제일의 맛을 다시 만난 것은 티베트에서였다. 고산증세로 밤새 고생을 한 후에 먹는 한 젓가락의 라면이다. 고산증세가 가라앉고 힘을 주는 라면 맛이었다. 다시 만난 멋진 라면은 티베트 라싸에서 북경으로 내려오는 칭짱열차 안에서였다. 중국 라면에 우리의 라면수프를 넣어 먹는 맛을 어디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참 대단한 맛이었다. 우리의 수프만을 넣은 라면이 대단한 위력을 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4,000 고지를 달리는 열차에서의 고산증과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주는 멋진 맛이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환장할 라면 맛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의 끝 자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