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봄은 오고 있었다.

(뒷산 나들이, 황금 낮달맞이꽃)

by 바람마냥

가느다란 겨울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우산을 챙겨 뒷산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스틱을 들고 나서야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으로 대신했다. 산길 초입에서 만난 산길은 며칠 전과도 달라졌다. 살을 에이는 바람이 아닌 살갗을 보듬는 바람이다. 계절의 대단함을 실감하게 한다. 가는 빗줄기에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오를 수 있어 기분마저 상쾌하다. 옆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다. 오는 사람이 없어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 참, 평범한 일상이 그리운 시절이다. 마스크 하나 벗었는데 이렇게 시원하다.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자그마한 산 길로 접어들자 산새들이 목청을 높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참견할 수도 없어 모른 척하며 지나간다. 무엇을 그리도 크게 지껄일까? 올봄에 새 집을 지을 계획을 세우는 걸까? 아니면 자식을 낳을 계획을 세우는 걸까? 새들도 그런 걱정을 하고 살겠지? 그런데 인간과 같이 쓸데없는 걱정은 없을 듯해 보인다. 강남에 집을 사야 하는 걱정도 없고, 비싼 학비 걱정도 없다. 인류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니 자소서도 필요 없고, 국회의원을 꿈꾸지 않아도 되니 헛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올라가자 포도 농장이 나타났다. 여름이면 향긋한 포도향을 내어 줄 포도밭이다. 농장 주인은 어느새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보온을 위해 엎었던 비닐을 벗겨 놓았고, 곳곳에 연장을 꺼내 손을 보고 있다. 여름이 지나 포도가 익어 갈 무렵이 그려진다. 흐뭇한 농부 얼굴이 떠오른다. 여름내 고생한 얼굴엔 고단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거기엔 뿌듯함이 녹아 있다. 언젠가 찾은 포도농장, 막걸리 한잔에 기분이 좋아지셨나 보다. 기어이 불러들여 막걸리 한잔에 포도 한 송이를 권한다. 주인도 좋고, 지나는 객도 신나는 포도밭 풍경이다. 여의도를 갈아엎고 포도나 심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잠시 해본다. 포도향이 그리워지는 산행길이다.


포도밭 고랑에는 눈이 녹고 겨우내 움츠렸던 푸름이 얼굴을 내밀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풀들이 고개를 든 것이다. 언제 봄이 오나 하고 고개 들어 두리번거린다. 작은 바람이 불자 얼른 고개를 숙이다. 다시 바람이 물러가자 고개를 든다. 바람과 숨바꼭질하는 여린 풀이 앙증맞다. 농장 뚝에도 푸름의 색깔이 젖어들었다. 어느새 눈이 녹는가 했는데 거기에도 봄을 준비하고 있다. 작은 잔디가 고개를 들었고, 작은 푸름이 언덕을 적시었다. 아무 걱정도 없는 푸름이 언제 봄이 오나 기다리고 있다.


산길로 접어들자 큰 나무들이 그네를 탄다. 칼바람을 버티며 지낸 나무가 듬직하다. 아직도 딱따구리 한 쌍이 집을 짓고 있다. 엊그제도 집을 지었는데 오늘도 짓는다. 아직도 짓는 집에 할 일이 많은가 보다. 내부 정리를 하는 모양이다. 자기가 짓고 싶은 곳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지을 수 있는 집이다. 집값이 오를 것도 없고, 내릴 걱정도 없는 오로지 살 집을 짓는 것이다. 산 아래 하늘을 가린 아파트 숲이 보인다. 어떤 집들을 짓고 있는지 딱따구리는 알고 있을까? 푸르른 자연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세우는 허세들이다. 허접한 마스크가 엄청난 재앙을 가려줄 것으로 믿는 어리석은 인간의 어설픔이다.


발길을 서둘러 오른 산 등성이엔 넓은 쉼터가 있다. 사람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있다. 인심 좋은 사람이 부채를 끈으로 매어 놓았다. 심심할 때 청소도 할 수 있는 싸리비도 준비되어 있다. 곳곳에 잠깐이라도 걸터앉을 수 있는 나무 등걸도 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많은 이에게 평안을 준다. 누군가가 한 톨의 낙엽도 남김없이 쓸어 놓았다. 적당히 낙엽이 있고, 적당한 산의 흔적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에 이웃을 배려하는 많은 흔적들이 아름답다. 허름한 부채가 있고, 적당하게 달아진 싸리비도 있다. 누군가 훌라후프도 준비 해 놓았다. 날씬한 몸매를 가꿀 수 있는 천하의 멋진 운동터가 이곳이다.


잠시 쉼으로 숨을 그른 후 언덕배기를 오른다. 언덕배기에는 힘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근력이 아직도 넉넉하면 언덕으로 향하고, 뒷다리가 뻐근하면 빙 돌아서 올라가면 된다.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서서히 망가지는 자연이 아쉽기도 하다. 쓸데없는 계단으로 고단했을 언덕이 고름에 따라 오를 수 있음이 너무나 좋다. 살아감도 사람의 취향에 따라, 삶의 방식에 따라 다르지 않던가? 오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감탄하며 오른 언덕에서 진달래를 또 만났다. 움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진달래이다. 다시 근육의 힘을 빌려본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만난 생강나무도 봄기운을 알았나 보다. 가지마다 움이 틀 준비가 끝이 난 듯하다. 작은 몽우리를 맺어 튀어나올 준비가 끝이 났다. 언덕배기에서 만난 봄기운이 산 아래로 흘러내린다. 먼 산엔 흐릿한 안개가 시야를 흐리게 한다. 저 멀리 있는 인간의 허세들은 안갯속에 묻혀 버렸다. 느닷없이 바람이 불자 소나무가 소리를 낸다.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이 아니다. 봄이 가득히 묻어 있는 바람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연은 벌써 봄이 오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는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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