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의 전설, 능소화)
지나는 길가 높은 담벼락에 밝은 주홍색 꽃이 주렁주렁 달렸다. 긴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꽃, 길게 넝쿨을 늘어트리고 담장 너머까지 꽃을 피웠다. 고즈넉한 기와집 담장에나 피는 능소화이다. 담벼락과 잘 어우러지면서 여름을 밝혀주고 있다. 여름이 깊어 갈수록 녹음은 점점 짙어지고 연초록은 어느새 검푸름으로 변하고 말았다. 널따란 들녘에도 푸름은 골골이 짙어져 엊그제 심어 놓은 벼도 검푸름으로 자리를 잡았고, 비탈밭에 심어진 여름배추도 고갱이를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농부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쯤 되면 초록에 조금은 지루해할 무렵, 능소화가 짙은 주홍색을 띠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준 것이다.
능소화, 중국이 원산으로 능소화과에 속한 낙엽 활엽 넝쿨나무이다. 언제부터인가 곳곳에서 꽃을 피우고, 오가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듯한 아름다운 꽃이다. 능소화(凌霄花), 능가할 능(凌)에 하늘 소(霄)요 꽃 화(花)이니 '하늘 높이 오르며 피는 꽃'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늘을 능가할 정도로 거만한 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능소화는 대부분 높은 담장이나 고목을 타고 올라 주홍빛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녹색의 잎에 어우러지는 주홍빛은 가는 발걸음을 잡기에 충분한 조화이다. 여름부터 피기 시작하여 가을에 열매를 맺는 능소화, 장원급제한 사람의 관모에 꽂은 꽃이었으니 양반들이 좋아하는 꽃으로 '양반꽃'으로도 불렸던 꽃이다.
어느 여인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는 꽃이기도 하다. 궁녀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받아 후궁으로 승격해 처소를 옮기고 임금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주변의 시기와 질투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사병으로 죽어 궁궐 담장 옆에 묻히게 된다. 소화가 죽은 이듬해에 무덤에서 나온 넝쿨이 담벼락을 타고 올라 주홍색의 화려한 자태로 고고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가능하면 높이 올라 궁궐 안을 오가는 임금님을 보려 하늘 높이 올랐다 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오른다는 능소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금을 제외한 사람이 몸에 손을 대면 통째로 꽃을 떨굴 정도로 임금님에 대한 절절한 기다림을 알 수 있는 꽃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토지'에서 능소화를 최참판댁의 명예를 상징하는 꽃으로 묘사할 정도로 고고하면서도 밝은 주홍색과 푸르른 잎이 잘 어우러지는 꽃이다. 화려한 듯하면서도 고고한 능소화가 꽃을 피우고 여름을 한층 밝게 빛내주고 있는 계절이다. 능소화는 잎, 줄기, 뿌리가 모두 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꿀이 많아 양봉농가에서 좋은 밀원으로 이용하는 꽃이기도 하다. 여름 한 나절 화려한 능소화를 만났다. 대단한 부잣집 담장에나 있을 법한 능소화가 길가의 울타리에서도 가득 꽃을 피웠다. 길게 넝쿨을 늘어트리고 꽃을 피워 밝은 햇살을 즐기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능소화가 우리와 가까이에서 꽃을 가득 피운 것이다.
아름답고도 고고한 능소화는 넝쿨식물로 삽목으로도 번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잎과 꽃을 잘라내고 마사토에 삽목을 하면 10여 일이 지나 뿌리가 난다고 한다. 기다란 넝쿨이 나무를 타고 올라 늘어지면서 피는 능소화, 누군가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그리움을 주는 꽃이다. 한편으로는 길게 늘어진 줄기가 무한정한 느긋함을 함께 주는 능소화이기도 하다. 껑충한 나무 꼭대기까지 거만하게 올라 축 늘어진 줄기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림은 있어도 가벼움이 없고, 언제나 느릿한 몸놀림으로 바람을 탄다. 슬픈 꽃의 내력을 알고 있는 듯한 바람결의 움직임이다.
주홍빛에 기다란 자태로 나팔꽃 모양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한 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조용히 들어 보려고도 하는 꽃 모양이다. 말하고 싶지만 참고 기다려야 하는 삶, 말하고 싶지만 조용히 들어줘야 하는 삶도 알려주는 듯한 꽃이다. 긴 기다림으로 꽃을 피우고, 언제나 참고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고이 간직한 듯한 아름다운 꽃이다. 고고하면서도 넉넉한 아름다움을 주는 능소화는 지나는 길에 만나는 꽃으로만 생각했지만, 한 번쯤은 뜰에 두고 계절 따라 만나 볼 수는 없을까 생각도 해본다. 쉽게 삽목도 가능한 꽃이라 하니 시골집에 한두 포기 심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화려한 능소화가 여름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꽃들의 잔치가 한층 고상해질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