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Sep 17. 2020

아이는 밤나무에게 바란다.

  (가을을 기다리며,  짤스브르크)

우리의 제사상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되는 조율이시(棗栗梨枾)의 율(栗)은 밤과 낮의 밤과는 발음이 다른 밤[밤:]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로 임금을 뜻하니 제일 첫 번째요, 밤은 세 톨로 이루어져 3 정승을 뜻한다니 두 번째로 놓여야 한다는 밤은, 우리와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과일이기도 하다. 또 밤을 땅에 심으면 싹이 돋아나고 나서 씨밤이 썩어 없어진다는 이유로, 밤은 조상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고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조상 때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골집 뒤뜰에는 밤나무가 한두 그루가 있어 어린 시절의 주전부리 감이 되었다.


빗방울이 추적대는 오후, 뜰 앞에 앉아 풀을 뽑노라니 앞산에서 사람이 내려온다. 이웃집 사시는 부지런한 아주머니이다.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계신데 가까이서 보이는 것은 알밤을 담은 비닐봉지였다. 앞산에서 알밤을 주워 오는 주이라면서 몇 개를 건네준다. 근처에 살면서도 밤이 익었는지 아니면 밤나무가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는데, 밤을 보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아내와 함께 앞산으로 갔다. 도랑을 건너 올라간 산에는 빨갛게 익은 밤톨이 제법 떨어져 있다. 아내와 함께 밤을 주으면서 오래된 기억을 꺼내 본다.


뒤뜰에 있는 서너 그루의 밤나무는 봄철이 되면 잎이 나와 무성 해지는듯하더니,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어느새 밤나무 꽃 향이 온 동네에 진동하게 된다. 밤나무 꽃이 향을 내는 것은 수꽃에서 나는 냄새로 밤나무 꽃은 암수가 같은 나무에서 피게 된다. 하얀색으로 기다랗게 피는 꽃이 밤나무 수꽃이고, 그 밑으로 자그마한 암꽃이 피며, 암수가 교정이 되면 암꽃에서 밤이 열리게 되고 수꽃은 수명을 다하고 떨어지게 된다.


밤꽃이 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벌들이 윙윙거리기 시작하니 여름이 무르익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여름이 오고 찌는듯한 더위가 시작되면 밤나무 꽃은 하나둘씩 검은색이 되어 대지 위에 드러눕게 되고, 어느덧 자그마한 열매를 맺게 된다. 밤이 열리면 가시가 둘러싸고 씨앗을 보호하고 있는 이유는 종족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사과나 배는 인간이 과육을 먹고 과육 안에 있는 씨앗을 먹지 않지만, 밤은 그 자체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밤이 열리고 여름이 지나 가을에 접어들면, 가을바람 따라 밤을 서서히 익어가게 된다.


아이는 밤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 설레며, 늘 이 계절을 기다려 왔다. 바람 소리에 밤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는 스산하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하지만, 어느덧 입을 떡 벌리고 밤이 익어가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다. 이렇게 밤이 익어 바람에 하나둘씩 알밤이 떨어지면 밤나무 밑을 항상 시끄러워진다.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밤을 줍고, 다람쥐도 부산하게 붉은 밤을 물고 나무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아이는 온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밤을 주워 넣어야 하기에 언제나 주머니가 많은 옷을 좋아했다. 바지 양쪽에 주머니가 있어야 하고 뒤쪽에도 있으면 더욱 좋으며, 위 옷에도 양쪽에 주머니가 있으면 더욱 좋아했다.

온 주머니에 밤을 가득 주워 넣고 하나씩 꺼내 먹는 주전부리 감으로는 으뜸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꺼내 입으로 겉껍질을 질끈 벗겨낸 다음, 앞 이빨로 속 껍질을 득득 벗겨 뱉는다. 속껍질이 대강 벗겨진 알밤을 입에 넣고 씹으면 약간은 씁쓰름하지만, 자꾸 씹으면 달큼한 맛이 온 입에 배며 고소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밤을 까서 먹으면 언제나 입 주변이 지저분해지고 번거롭기에 아이는 밤을 까먹을 수 있는 자그마한 칼을 좋아했다. 자그마한 칼을 잘 들게 갈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언제나 유용했다. 나무를 이용한 갖가지 도구를 만들 수도 있고, 특히 밤을 주워 까먹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밤나무는 불그스레한 밤송이를 가득이고 가을을 재촉하며, 하나둘씩 밤송이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주인은 밤나무에 올라 장대로 밤을 털어내고, 아래에서는 안주인이 밤을 하나씩 줍는다. 알밤은 앞에 친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아직 덜 익은 밤송이는 집게로 주어 모아 놓는다. 하지만 밤나무 밑에서 밤을 줍는 사람은 밤송이가 떨어져 다칠 염려가 있기에 항상 조심을 해야 했다. 되도록이면 밤을 털고 난 뒤에 주워야 하지만, 마음 급한 안 주인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밤을 줍는다.  


밤나무도 일찍 익는 밤이 있고, 늦게 열어 늦게 익는 늦밤이 있기에 가을이 질 때까지 밤 털이는 계속되어야 했다. 고단한 밤 털이가 지나고 나면 수북하게 쌓인 밤송이는 구덩이를 파고 묻어 놓고, 알밤은 모아 자루에 넣는다. 이렇게 땅속에 묻어 놓으면 가시가 있는 겉껍질은 썩으면서 발로 밟고 비비기만 하면 알밤을 골라내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알밤으로 모아진 밤은 우선 다가오는 오일 장에 팔아야 하고, 땅속에 묻어 놓은 밤은 봄이 오고 밤 값이 오르면 내다 팔 작정이다. 모두가 좋은 주전부리 감인 밤 값을 그런대로 좋은데, 좋은 값을 받아도 안주인은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팔고 남은 밤은 부엌 구석에 자그마한 구덩이를 파고  묻어 놓으면 가끔씩 꺼내 아이들에게 주는 주전부리 감이 되기도 하고, 겨울에 있는 제사상이나 설날 차례상에 올릴 중요한 제수 거리가 된다.


서서히 겨울이 가고 봄빛이 내려온 날, 지난가을에 묻어 놓은 밤을 양지바른 곳에 꺼내 놓고 알밤을 발라낸다. 허름한 장갑을 끼고 발로 슬쩍슬쩍 밟으면 알밤이 골라지는데,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것은 썩거나 벌레가 들어 버려야 하는 것이 많아진다. 하나둘씩 발라진 알밤을 모아 물에 닦아내면 발그레한 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몇 말이나 되는지 어림짐작을 하며 안주인은 힘든 줄도 모른다. 붉은빛을 발하는 밤을 팔아 가용 돈을 마련해야 살림을 꾸려가는 돈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밑천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낮을 가리키는 밤이 아닌 밤[밤:]은 이렇게 일 년을 돌아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 날 무렵 아이는 다시 밤나무를 바라보며 기대를 한다. 올해도 밤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풍성한 여름을 되어라. 묵직한 밤나무가 여름을 지나면서 옹기종기 다복하게 밤이 열리고 영글어 성스러운 가을을 맞이하게 했으면 하는 기대를 했다.


이제, 세월이 변해 밤도 품종이 개량이 되고, 산마다 대량으로 심어 엄청난 밤을 생산해 내고 있다. 하지만 먹을 것이 풍부해진 지금은 밤을 찾는 아이도 드물어지고, 선호하는 아이들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넓은 면적에 수만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여름이면 하얀 꽃이 온 산을 뒤덮고, 가을이면 엄청난 양의 밤이 생산되고 있지만 오래 전의 밤의 맛과는 전혀 다르다. 오래 전의 밤은 딱딱하면서도 고소함을 주지만, 개량된 밤은 고구마의 강도와 비슷하면서 수분은 많지만 고소함이 덜하다.


밤을 수확할 사람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를 대량으로 고용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밤을 주워 오면 주운 양의 일정량을 노동의 대가로 준다고 하니 세월이 이렇게 변하고 있음에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오래 전의 발그레한 밤이 주머니에 가득하고, 언제라도 주전부리로 할 수 있었음은 언제나 즐거운 추억거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 동넨 뻐꾸기가 낮잠 재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