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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Sep 25. 2020

고구마의 아름다운 추억

(고구마가 주는 이야기, 덴마크 오덴세 마을)

머리맡에 있는 자리끼가 얼어붙는 방, 위쪽엔 겨우내 커다란 고구마 통가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통가리는 싸리나무로 둥그렇게  만들어져 있고, 앞쪽으로는 고구마를 꺼내기 좋도록 낮게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길고 긴 겨울날, 시골에서 먹을 것이 넉넉지 못했을 당시엔 고구마로 점심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질척한 고구마를 삶고 김장김치나 아니면 동치미를 곁들인 고구마가 점심이 되었다. 그러니 고구마 통가리는 겨우내 점심을 책임지는 곡식창고 노릇을 했고, 집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날씨가 추우면 윗목에 자리한 고구마가 썩는 것이 걱정되어 이불로 덮어 주기도 하였고, 겨울 한철의 점심을 책임지는 고구마는 부모님의 남다른 보살핌으로 만들어지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봄철이 다가와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 중순이 되면 어머니는 고구마를 심으셨다. 고구마를 심기 위해서는 고구마 줄기를 길러야 하는데, 고구마를 따스한 온실에 묻어 두어야 고구마 싹이 나오게 된다. 고구마 싹이 나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고구마 줄기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땅에 심으시는데, 빨간 황토밭에서 나는 고구마가 언제나 밤과 같이 적당히 달큼하면서도 밤과 같은 맛이 났다. 고구마보다 잘 자라는 풀이 나는 대로 뽑아주면서 적당히 물과 퇴비를 주면 따스한 햇볕에  좋은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리곤 했다. 부모님이 하시는 것은  언제나 쉬운 듯 하지만 막상 해 보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오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고구마 줄기가 실하게 뻗어 나고 고구마 줄기가 밭두둑을 덮을 때가 되면, 고구마 줄기는 또 멋진 반찬으로 거듭 태어난다. 연한 고구마 줄기를 따서 억센 줄기의 껍질을 벗겨낸다. 이것을 뜨거운 물에 데쳐 양념을 해 먹는 맛은 고소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주었다.지금도 우리의 밥상 한 자리를 차지하는 멋진 반찬이다.


여름을 지나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이 되면 고구마 수확하게 되는데, 조금 늦어 서리를 맞게 되면 고구마가 잘 썩는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하지만 너무 일찍 캐면 덜 영글어 맛이 어쩐지 모자란 듯하고, 너무 늦게 수확을 하면 고구마에 자그마한 싹이 돋아나 맛이 덜하게 된다.


적당히 익은 시기를  골라 수확을 해야 하는데, 수확의 기쁨을 맛보아야 하는 고구마 수확은 즐거움도 있지만 대단한 노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고구마를 캐기 수월하도록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잘라내고, 쪼그려 앉아 고구마를 캐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고구마 캐기는 호미질을  잘하여야 하는데, 고구마 뿌리가 있는 부분을 파내려 가면  고구마가 호미에 찍히면서 상하게 되고, 상한 고구마는 오래 보관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마 줄기를 잡고 뿌리로부터 조금은 먼 부분에서 뿌리 쪽으로 부드럽게 캐어야 안전하다. 더러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고구마가 있기에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땅속에 남아 있는 고구마를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구마를 캐어 고랑에 넓게 펼쳐 놓아야 물기가 마르고 보관이 수월해 좋다. 고랑에 적당히 널어놓은 고구마에 습기가 마르면  고구마를 옮겨야 하고, 고구마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고구마는 캐는 대로 바로 쪄서 먹는 것이 제일인데, 바로 쪄서 먹으면 적당한 수분이 함유되어 부드럽기도 하고, 달큼한 맛을 주어 입안에 부드러움을 안겨준다. 이렇게 수확한 고구마는 보관이 상당히 어렵다.


가을에 캐어 겨울까지 보관하면서 먹어야 하기에 적당한 수분과 온도를 유지하기가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시골에서 보관하는 방법은 현재와 같은 저온 창고가 없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방안의 정당한 장소에 싸리나무나 수수깡으로 둥글게 원통형 보관창고를 만들어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하였다. 대부분은 겨울 먹거리로 사용하였는데, 겨울 저녁의 간식거리로 요긴하게 이용되었고, 더러는 밥에 채로 썰어 넣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식량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기에 식량을 아끼기 위해 밥에 섞인 고구마 밥을 먹는 것은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다.


어려운 시골의 살림살이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먹는 고구마 밥을 싫어했으니 어머님은 늘 불편했으리라. 어쩔 수 없이 고구마 밥을 먹어야 했지만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하얀 쌀밥이 귀하던 시절에 그 맛을 잊지 못해서였으리라. 그렇지만 출출한 겨울 저녁에 수분이 듬뿍 담긴 달큼한 고구마를 깎아 먹는 맛은 겨울밤을 즐겁게 해주는 간식거리이면서 가족끼리 모여 앉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가끔은 밥을 하고 남은 아궁이 불에 구워 먹는 군고구마는 달큼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주었고, 추운 겨울밤 화롯불에 구워 살짝 탄 고구마 맛은 오랫동안 입안에 남아있는 멋진 추억의 맛이었다. 뜨거운 불에 습기가 마르면서 약간은 쭈글쭈글해진 구운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얼음이 약간 낀  김장김치와 곁들여 먹는 그 맛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맛이었다. 가끔은 먹기 싫어하던 고구마가 세월이 흐르고, 오래전 입맛이 되살아나 그 맛을 되새겨볼 수 있어 좋다. 고구마를 먹었던 소소한 재미를 기억하고, 그 날의 아름다운 그림을 기억해 냄이 고구마의 오래전 맛을 꺼내주어 마냥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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