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삼덩굴을 보면서, 환삼덩굴)
지나는 길가, 이름 모를 듯한 덩굴에 하얀 꽃이 피었다. 작은 싹이 나왔던 것인데 벌써 긴 덩굴로 자란 것이다. 곳곳에 깔끌깔끌한 가시가 있어 만지기도 어렵다. 곳곳에 있는 나무에도 기어 올라갔다. 언제 올랐는지 나무 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듯 일렁인다. 온갖 숲을 깔고 앉아있다. 포장도로 위에도, 언덕 바위에도 세를 불렸다. 밑에 갈린 숲 덤불은 숨을 쉴 수 조차 없이 가는 한 숨으로 대신하고 있다.
순간,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생각이 났다. 두 팀으로 나누어 친구들의 목마에 올라 상대팀을 무너트리던 기마전이다. 친구들 어깨에 올라앉은 친구는 개선장군처럼 호령을 했었다. 상대의 목덜미를 잡으려 안간힘을 쏟으며 허공으로 손을 내 저었다. 나무에 기어오른 덩굴이 그런 기세이다. 곳곳의 나무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있다. 환삼덩굴이라는 식물이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골목대장 같은 식물이다.
환삼덩굴, 나무를 자르거나 가는 연장인 '환'을 닮았고, 잎은 삼베를 만드는 삼잎을 닮았다 하여 '환삼덩굴'이라 하는 식물이다. 껄걸이 풀, 범삼덩굴 등으로도 불리는 풀이다. 일 년생 초본 덩굴식물로 풀밭이나 빈터 등 곳곳에서 종자로 번식하는 풀이다. 줄기와 잎자루에 밑을 향한 자잘한 가시가 있어 만지기가 불편하다. 나무를 다듬는 기계 '환'과 삼잎을 닮아 '환삼덩굴'이라 한다는 이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삼덩굴이다.
초봄, 뒤뜰 언덕에 작은 풀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손톱만큼 자랐던 풀이 성큼성큼 키를 불린다. 환삼덩굴임을 직감하고 어린싹을 뽑아내야만 했다. 새봄을 맞이해 살려고 나온 어린싹을 뽑아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아침 이슬에 젖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어린싹, 봄이 왔음을 몸소 알려주는 어린싹이다. 어린싹을 보고 훗날의 행태를 생각해보는 환삼덩굴이 불편하기만 하다. 혹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인간사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작은 식물을 보며 뿌리까지 뽑아내고 있다. 불편한 아침나절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계절, 뒤뜰에도 갖가지 뜰 식구들이 자라나고 있다. 봄을 지나 여름으로 오는 계절, 저마다의 키를 불리며 계절을 노래한다. 칡넝쿨과 더불어 몸집을 불린 환삼덩굴, 온갖 식구들을 괴롭힌다. 작은 더덕 덩굴을 건드린다. 순진한 더덕은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본다. 덩달아 기대어 사는 이웃들이지만 환삼덩굴의 극성을 이길 수가 없다.지난봄에 심어 놓은 어린 회양목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정성 들인 회양목인데, 온데 간데없이 환삼덩굴이 짓밟고 말았다. 어린 회양목은 말도 못 하고 숨만 쉬고 있는 형국이다.
칡넝쿨처럼 주변 식물에 올라가 그늘을 만들어 살지 못하게 한다. 한의학에서는 '율초(葎草)라 하여 혈압을 낮추고, 이뇨재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주위에 있는 식물에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울타리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길가의 곳곳에서 심술을 부린다. 약용으로 이용되고, 먹거리로 쓰일 수도 있다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긴 세월을 살아감에 나의 삶은 그렇지 않았을까? 혹시, 누구를 찝쩍거려 불편하게 하진 않았을까? 거친 가시처럼 성가시게 하지는 않았을까? 잠시 지난 세월 속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어렵게 살아온 삶, 모두가 명(命)을 이어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난의 세월이 흘러 대부분 앉을만한 터전을 마련하고 편한 숨을 쉬게 되었다. 가끔은 불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웃을 찝쩍거려 불편함을 주고, 가끔 천하를 얻은 듯이 기어오르는 환삼덩굴도 된다. 껄끌한 손으로 기어올라 천하를 호령하듯 거드름을 피운다. 가끔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 이야기들이다. 나만의 고집으로 불편한 이웃이 되고, 푸르른 환삼덩굴이 되어 세월 속에 허튼 삶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그리고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환 같은 모양으로 삼잎을 닮은 덩굴식물, 여름이 깊어 갈수록 온갖 나무를 감싸고 숨을 막아서고 있다. 초봄에 어린싹을 열심히 뽑아냈지만 그만한 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원의 무법자이다. 근근이 꽃을 보호하기 위해 제거하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번진 덩굴을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의 식물이다. 곳곳에 칡덩굴과 함께 뒤뜰을 어지럽히는 혼란스러운 푸르름 중에 하나이다. 식물은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다. 이웃의 삶이 그러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삶이 나만의 살아감을 위해 이웃을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얼기설기 얽혀있는 환삼덩굴을 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