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내며, 텃밭에 핀 곰취꽃)
여름 텃밭을 정리해야겠다. 클 것도 없는 텃밭, 기껏해야 열평도 안 되는 텃밭이다. 여름내 푸르른 상추로 밥상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아내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곳이다. 제일 큰 텃밭엔 상추와 쑥갓이 있었고, 푸르른 곰취가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삼겹살의 덧옷 역할을 충분히 했고, 향긋한 향을 자랑하는 곰취의 품위는 빼놓을 수 없었다. 아내가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건네는 상추 식구들은 언제나 약간의진실과 거짓이 섞인 '맛있다'는 한마디로 농사(?)에 대한 용기를 넣어 주었다. 아욱도 빼놓을 수 없는 텃밭의 식구였다. 구수한 된장국에 말린 새우와 함께 우려진 아욱 맛은 '아욱국은 문닫고 먹는다'는 말에 충분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맛이었다. 두번째로 큰 텃밭의 역할도 대단했었다.
봄부터 여름 내내 푸름과 붉음으로 빛내주었던 작은 텃밭, 거기엔 토마토 가족과 가지가 자라고 있었다. 봄철, 망설임도 없이 간택되었던 토마토와 가지는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어린 모종을 심어놓자, 스스로 자리를 잡고 자라난 토마토는 풍부한 밑거름에 감탄을 했는지 열심히 열매를 불려 놓았다. 싱싱함에 입으로 직행하는 아침 토마토 맛,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그 맛을 어디서 맛볼 수 있단 말인가?
주렁주렁 달려 충분히 익은 토마토는 손녀가 올 때까지 매달려 있어야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묵언의 합의하에 손녀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온 손녀가 붉은 토마토를 따먹는 모습을 그리며 심은 토마토였다. 가끔 찾아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길러 놓은 토마토를 따먹는 모습은 잊지 못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맑은 이슬이 앉은 방울토마토, 큼직한 모습으로 자연의 색을 마음껏 뽐내던 토마토는 깜짝 놀랄 맛을 선사해 주었었다. 토마토의 눈치를 보면 옆에서 자란 보랏빛 가지가 있다.
줄기를 통해 올라오는 대지의 힘을 버틸 수 없어 던 지 하루가 다르게 키를 불렸다. 지난해 부진했던 가지 농사를 만회해 주려는 듯이 곳곳에 열매를 맺었다. 길쭉한 몸매를 자랑하는 가지, 아침나절 이슬이 내려왔다. 덩달아 보랏빛에 맑은 햇살이 찾아왔다. 보랏빛 가지에 맑은 이슬과 햇살이 만나 빚어내는 색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의 조화에 할 말을 잊고 말았었다. 가지를 먹는 것보단 빛깔에 감동하고 고마워했던 가지였다. 여름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고추도 몇 번을 베풀었던 퇴비의 힘을 물리칠 수 없었나 보다.
세 번째 텃밭이 있는 언덕 밑, 그곳엔 고추와 도라지가 있다. 천연 퇴비와 대지의 힘에 떠밀려 올라온 고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열매를 맺었다. 삼겹살에 어울리고, 붉은 고추장에 천생연분인 풋고추이다. 큼직한 놈을 따서 고추장에 푹 찍어 먹는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매콤함이 콧등을 적시어 준다. 다른 매운맛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시원하면서도 매운맛, 느닷없이 풍겨 나와 서서히 사라지는 상큼한 매운맛을 잊을 수가 없다. 아침저녁으로 고추밭을 찾아가는 이유이다. 이웃집 고추밭도 붉게 물들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나선 길, 붉은 고추가 나무마다 묵직하게 달려 있다. 고추밭을 바라보는 눈 모양이 달라지는 이유이다. 농부가 그냥 농부가 아닌, 자연 속에 예술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떻게 저리도 예쁜 밭을 만들어 놓았을까?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고추밭의 풍경이다. 고추나무마다 붉은 고추가 가득 열려 섣불리 농사짓는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단한 요술을 부려 놓은 모습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텃밭의 고추가 훨씬 좋다. 아내가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며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이 감탄 해주어 좋다. 맑은 매운맛이 상큼해 더욱 좋다. 가을바람이 서서히 불어온다. 뒷걸음질하는 여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을이다.
어느새 텃밭 식구들도 할 일을 다한 모양이다. 상추도 긴 꽃대를 세워 놓았고, 푸르른 곰취도 예쁜 꽃을 피워 놓았다. 토마토도 할 일을 다한 모양이다. 잎은 벌써 누렇게 색칠을 해 놓았다. 다만, 고추는 여름과 한참 이야기 중이다. 푸르른 고추를 달고 가는 여름과 협상 중이다. 푸름과 붉음을 오가며 나머지 여름을 불태울 모양이다. 서서히 토마토 밭과 상추밭은 정리를 해야겠다. 가을로 가는 길에 몇 포기의 배추를 심어야 겨우내 싱싱한 배추쌈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과 협상 중인 풋고추는 얼마를 더 버티며 자연의 고마움을 전해 줄런지 오늘도 고추밭을 오가며 매운맛을 음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