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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Sep 18. 2021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가을날의 기억 속으로, 베고니아)

가을이 점점 다가오던 주말, 가끔 만나 식사를 하는 친구 부부를 만났다. 20여 년간 배낭여행도 같이 하고, 국내여행도 하는 가까운 친구다. 식사한지도 오래되어 근교로 식사를 하러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술 한 잔 곁들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세월이 흘렀는지 마음이 변했나 보다.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소곳이(?) 식사를 했다. 무엇인가 빼놓은 듯싶지만 별로 이상하지도 않고, 세월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식사를 끝내고, 산책 겸 근처의 카페를 찾기로 했다. 긴 언덕을 올라서 만난 카페, 어쩐지 낯선듯한 커피를 마시러 찾아간 것이다. 막걸리 잔이 어울리고, 소맥을 찾던 시절이 가고 커피를 찾는 시절이 된 것이다. 남들의 사치품으로만 알았던 커피를 마신다니 변한 세월이 새롭기만 하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밀려 들어서는 카페 입구,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빨갛게 핀 베고니아가 살아 움직일듯한 것이다. 푸르른 청춘을 만난 듯이 싱그럽다.  


싱싱함과 신선함을 주는 베고니아, 언제나 작은 키에 붉은 입술을 달고 있었던 베고니아였다. 젊은 청춘을 닮은 싱싱한 베고니아가 화들짝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다. 베고니아를 보는 순간, 가을 추억들이 퍼뜩 떠 올랐기 때문이다. 우선은 아들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다. 또 하나는 색소폰 연주회에 대한 기억이다. 아들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수없이 찾은 일본, 아들 덕분에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했다.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잠도 자보고, 시골길을 찾아 나서기도 했었다.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먹거리도 만났었다. 언제나 여행은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최고 아니던가? 다시 시골을 찾아 나섰다. 볼거리와 먹거리를 찾아서다.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술집, 어둑한 불빛에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이다. 벽에는 갖가지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고, 사장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맨 흥이 많은 사람이다. 이것저것을 묻던 사장,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다. 서울에 와 봤단다. 멋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며 신이 났다. 아들이 다니는 대학을 묻더니 대단한 아들을 두었다며 추켜 세워준다. 사장은 다짜고짜 조용필의 노래 '서울 서울 서울'을 아느냐고 묻는다. 알고는 있지만 부르지는 못하겠다는 말에 신이 났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창곡 중에 애창곡이란다. 홀에 설치되어 있는 마이크를 잡더니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가수 못지않은 노래 실력에 흥이 났다.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차를 마시면                                                     우체국 계단

 내 가슴에 아름다운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냇물이 흐르네                                                  그녀의 고운 손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그 언제쯤 나를 볼까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마음이 서두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묶은 맥주집 사장님, 한국에 매료되고 노래에 심취해 한참을 함께 어울리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의 감정을 잔뜩 건드려준 맥주집 사장님,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림이다. 익어가는 가을 따라 베고니아를 보고 떠오른 노래가 또 있었다. 우리의 감성을 그냥 두지 않는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였다. 왜 베고니아를 보고 '광화문 연가'가 생각났을까?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기억해 봐야 하고, 무엇인가를 그리워해야 하는 계절이 왔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추억의 계절이고 사색의 계절, 가을을 맞이했다는 징조였으리라.

오래전 기억 속에 '광화문 연가'가 있었다.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다. 연말 연주회를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 고민을 했다. 운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 어떻게든지 혼자 연주를 해야 했다. 긴장이 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었다.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까? 고민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였다. 가을 따라 생각나는 사람도, 그리운 추억도 많아 선택한 곡이었다. 색소폰 연주회 날, 버벅거리며 가까스로 연주회를 끝냈다. 박자가 어떻게 되고, 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긴장 속에 어렵게 연주를 해 냈지만, 뇌리 속에는 깊숙이 박혀있는 그리운 가사였나 보다. 가을날에 만난 베고니아가 광화문 연가의 추억을 불러내 준 것이다. 


색소폰 연주를 시작한 것도 꽤 되었지만, 아직도 초보 노릇을 하고 있다. 왜 그렇게 음악에 소질이 없는지 늘 불만스럽다. 우선은 박자에 둔감하고, 세월 탓인지 운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반 박자의 길이에 한없이 좌절했고, 한 박자 반 길이에 또 낙담했었다. 어느 정도 극복한 지금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며 홀로 흥에 겨워한다. 이층 서재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소프라노 색소폰, 멋지다는 착각 속에 또 연주를 한다. 그 속엔 추억이 젖어 들고, 세월과 함께 그리움이 녹아 든다.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아련함에 젖어 든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무엇인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계절이 되었다. 연말 색소폰 연주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동호회 회원들과 일 년을 마무리하는 연말 연주회를 해야 한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기백명을 초청해 성대한 연주회가 될 텐데, 작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거리두기를 해야 하고, 인원수를 제한해야 한다. 이젠, 11월 초순까지 회원들의 힘을 모아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회원들을 독려해 연주회를 온전하게 만들어 내야 한다. 괜한 걱정거리 같지만 이만한 걱정도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합주곡을 완성하고, 리플릿과 안내장을 만들며 연주회장을 설치해야 한다. 합주곡도 해야 하지만 개인 곡도 완성해야 한다. 올해는 무슨 곡으로 연주 해야 하나? 먼 훗날 '광화문 연가'와 같이 세월을 추억하고,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곡을 선택해야겠다. 붉은 베고니아가 꺼내 준 오래 전의 추억, 거기엔 여행이 있었고 색소폰 연주회가 있었다. 먼 훗날 나를 기억해 보고, 세월을 추억할 수 있는 가을 연주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은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을바람과 베고니아가 만들어 준 가을날의 추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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