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욤이 주는 어머님의 그리움)
대문을 나서 이웃집으로 가는 길가엔 커다란 고욤나무가 있었다. 고욤나무 아래 한쪽 밑으로는 풀이 무성하고, 한쪽으로는 고욤나무가 평평한 길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 따스한 봄철이 되면 푸릇한 고욤나무 싹이 나오는 듯하더니 어느새 자그마한 노란 꽃이 피기 시작한다. 줄기마다 노란 꽃이 대롱대롱 달려 있기도 하고, 수줍은 듯이 작은 잎새에 숨어 바람 따라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어느덧 봄바람이 찾아와 나무를 흔들면 노란 꽃은 바람을 못 이기고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노랗게 물든 길과 풀숲은 고욤 꽃으로 가득하고, 어린아이는 기다란 실에 노란 꽃을 꿰여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다. 뒤뜰 언덕바지에도 작은 고욤나무가 있었는데, 그 곁에는 가시덤불이 수북해 다가가기가 힘들었지만 언제나 많은 고욤이 열려 듬직함을 주었다.
봄철 꽃이 피고 여름이 익어가면서 고욤이 달리기 시작하면 많은 양이 달렸고, 가을이면 제 몸을 추단도 하지 못할 정도의 고욤을 달고 있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마다 도토리만 한 크기의 고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마치 가지가 부러질 듯하기도 하다. 여름 빗줄기를 맞으며 익고, 가을이 깊어지면 고욤은 계절 따라 영글어 간다. 송골송골한 표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서로가 뒤엉켜 달려 있는 모습은, 마치 실로 역어 놓은 듯이 가지 가득히 달려 있다.
더 가을이 깊어지면 고욤은 수분이 증발하면서 표면이 약간은 쭈글쭈글해진다. 가을이 깊어 하얀 서리가 내릴 무렵, 고욤을 따 먹으면 약간은 쫄깃한 껍질의 식감이 뛰어나고, 고욤의 과육이 주는 달큼함은 감보다도 뛰어나다. 가끔 심술궂은 바람을 못 이기고 고욤은 땅에 떨어지기도 하면서 몸 깊숙이 달큼함을 저장해 간다.
고욤이 달큼함을 가득 지닐 무렵이면, 오가는 새들은 고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온갖 새들이 찾아들어 어떻게 아는지 익은 것만 골라 허기진 배를 가득 채운다. 새들이 배를 불리고 남은 고욤이 바람 따라 익어가면, 어머니는 고욤을 털기 위해 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고욤나무를 흔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고욤은 후드득 소리를 내며 자리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자리를 벗어나 숲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렇게 털고 남은 고욤은 수분이 다 빠지고 검게 쪼그라들면 지나는 새들의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고, 남은 것은 더 검게 말라 고욤나무 끝에 매달려 세상을 지켜보기도 한다.
어머니는 고욤이 떨어진 돗자리를 골이 지게 들어 고욤을 모으고, 작은 단지에 담아 어둠 컴컴한 뒷광에 쟁여둔다. 뒷광에 쟁여진 고욤은 추위와 씨름을 하며 얼기도 하고, 숙성이 되면서 성스러운 가을의 맛을 주는 겨울 저녁의 멋진 간식거리가 된다.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러 영근 고욤은 뒷광에 숨겨진 겨울의 간식이 되어 출출한 겨울 저녁에 멋지게 출연을 한다. 긴긴 겨울 저녁 출출한 때, 어머니는 뒷광의 고욤 단지를 열고 약간의 얼음이 성긴 고욤을 한 사발 덜어 오신다. 긴긴 겨울밤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얼음이 섞인 고욤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달큼한 맛은 단숨에 입안을 가득 메운다. 고욤을 한가득 입에 넣고 고욤 안에 있는 씨앗을 혀로 발라내면서, 차가운 고욤을 먹기 위해 입을 좌우로 흔들며 먹는 맛은 겨울 저녁의 큰 재미이기도 했다. 한 번에 많이 주시지도 않고 적당히 단맛을 볼 만큼만 내어 주시는 어머니의 지혜는 늘 감탄하지만, 조금만 더 먹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늘 가지게 된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으니,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어려운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먼 산길을 돌고 돌아 고욤나무가 있는 곳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발품을 팔기도 하였으며, 그저 감사하면서 세월을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고욤나무와 감나무가 어떤 관계인 것인가를 알기에는 한참을 지난 후의 일이다. 고욤의 맛과 감의 맛은 비슷하지만,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야만 맛있는 감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리라.
보통은 감의 씨를 심으면 감나무가 되어 맛있는 감이 열릴 것으로 알지만 그렇진 않다는 것이다. 맛있는 감을 먹고 씨앗을 심으면 감나무가 되어 감이 달리기는 하는데, 감이 적고 씨가 많아 볼품이 없는 '돌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맛이 있는 좋은 감에서 얻은 씨를 심어도 이렇게 되는 이유는, 생식세포가 만들어지고 암수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유전자가 섞이기 때문에 원래의 형질을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어렴풋이 감나무를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감나무를 잘라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보기도 했다. 양지바른 곳에 있는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잘라 접을 붙여 보기도 했지만, 접을 붙인 감나무가 죽고 마는 것을 봐야만 했다. 다시 정성을 들여 맛있는 감나무를 비스듬히 깎고, 여기에 맞도록 고욤나무를 깎아 붙이고 고정시켜 봤지만, 어린아이는 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단감이 대세인 요즈음엔 고욤나무를 쉽게 만날 수도 없고, 고욤의 맛을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긴긴 겨울 저녁에 만났던 얼음으로 변한 고욤의 맛은 마음속으로만 그려보는 아름다운 맛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흘러 오래 전의 고욤나무가 그리워지고, 겨울 저녁에 먹을 수 있었던 시원한 고욤의 맛은 잊을 수 없는 맛이 되어 가끔 되새겨 보는 겨울날의 추억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