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의 생각, 수수가 익어가는 계절)
'나는 이만해도 충분햐!, 주머니에 넣고 가다 쉬면서 까먹어!'
'아녜요, 저의 집에도 밤이 많아요, 할머니 가져가세요'
'아녀, 아녀, 얼른 주머니에 넣어. 난 이걸로 충분하다니까!'
밤나무 밑에서 밤을 줍던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이다.
여느 아침처럼 자전거에 올라 비탈길을 내려간다. 벌써 서늘하다는 생각에서 싸늘하다는 느낌이 오는 아침이다. 곳곳에 내린 아침이슬이 햇살에 반짝임이 환상적이다. 언제나 맛볼 수 있는 시골의 맛이다. 작은 냇물을 끼고 돌아가는 곳, 시골의 작은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잘 정리된 정원에 주일 예배 때문인지 차가 가득하다. 교회의 모습도 바뀐 지 오래이다. 주차장이 널찍하고, 푸르른 넓은 잔디밭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오솔길을 걸어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가는 곳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길들이 참 많다. 가끔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도 드물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가고 싶은 곳엔 언제나 길이 만들어져 포장이 되어 있다. 작은 시골길에도 어김없이 포장이 되어 하얀색으로 반듯한 선이 그어져 있다. 멀쩡한 길을 두고 새 길을 만들기도 한다. 새 도로를 사용하면서 기존 도로는 쓸모없이 방치되어 있음에 불편하기도 하다. 저렇게 많은 도로가 필요한 걸까? 인간의 편리함이 극에 달한 기분이다. 조금 불편해도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면 않될까?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또, 쓸데없는 생각으로 윗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있다.
몇 년 전, 노르웨이를 배낭여행하던 생각이 떠 오른다. 고속도로가 우리나라 시골 이차선 도로와 같다. 인구가 적어서인지 전혀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렇게는 살 수 없을까? 조금 불편해도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또, 윗사람들이 들으면 불편한 생각을 한다. 원래 쓰던 도로 앞에 커다란 도로가 어느새 만들어져 있다. 시골사람들의 편리함을 추구하는데 할 말이야 없지만 가끔은 씁쓸하기도 하다. 새로 만들어진 긴 도로를 타고 올랐다. 아직도 곳곳에 작업중이라 불편한 곳이 많다.
모든 산에는 아직도 푸르름이 가득한데, 가을날의 전령 밤나무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밤이 익을 대로 익어 밤송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산자락에 알밤이 벌겋게 떨어져 있다. 힘겹게 올라 길모퉁이를 돌아가자 그럴듯한 승용차가 한 대 서 있다. 아침부터 무슨 차이지? 페달에 힘을 주며 돌아선 모퉁이, 두 아주머니가 밤을 줍고 있다. 등산화에 완전무장을 하고 배낭까지 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소리에도 관심 없이 밤을 줍고 있다. 묵직한 배낭이 힘겨워 보이지만 밤 줍기에 여념이 없다. 서둘러 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산 바람이 시원하다.
새로 만들어진 도로가 오지 사람들도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속도를 낸다. 산 모퉁이를 돌아오자 밤을 줍던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메고 있는 배낭이 전보다 훨씬 묵직해 보인다. 잠시 후, 힘겹게 배낭을 벗어 트렁크에 넣고 쾅 소리가 나도록 닫는다. 산밤을 한껏 주운 모양이다. 얼굴에는 뿌듯한 모습이지만, 어딘지 모를 비장함이 묻어있다. 산에 있는 밤을 다 주으려는 태세다. 문을 닫고 나선 아주머니들, 오가는 사람에는 상관이 없이 우거진 산속으로 몸을 감추고 말았다.
시골길 어느 곳에도 밤송이들이 즐비하다. 발길에 밟히고, 차에 치여 처절한 모습이다. 비탈길을 올라 선 시골 마을, 골짜기에 있는 작은 집수리가 한창이다. 형제들이 모여 데크를 손질하고 있다. 오래전에야 살기 힘든 곳이었겠지만 이젠, 그 만한 좋은 집터가 없을 듯하다. 부모들이 만들어준 천혜의 자리에 형제들이 다 모였나 보다. 못을 박고 막걸리를 나누며 하늘만 보이는 골짜기가 시끌시끌하다. 다시 힘겹게 올라 선 산 말랭이, 노 부부가 아침 등산을 나선 모양이다.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알밤이 들어 있나 보다. 밤을 주으러 나선 부부의 행색이다.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을 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한다. 산을 내려선 산성, 호수가 한적하다.
고즈넉한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호젓한 의자에 아침상을 차렸다. 아내가 싸준 빵 세 조각, 오이 하나와 사과가 있고 찐 밤이 있다. 마치 어린 시절 소풍을 온 기분이다. 밝은 햇살이 비친 호수에도 가을이 가득히 왔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천하제일의 아침 식탁을 차리고 앉았다. 빵과 오이 그리고 알밤으로도 충분한 아침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아침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서둘러 성찬에 감사해하며 다시 자전거길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은 한결 수월하지만 가끔 나타나는 언덕이 힘을 달라 한다.
길가엔 억새와 갈대가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분홍색 고마니 풀이 분홍색 꽃을 가득 피웠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길, 깊 옆에 유모차가 세워져 있다. 근처 어르신의 자가용인 모양이다. 비탈 밭 근처에 할머니가 보인다. 작은 보자기가 놓여 있고,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여기저기를 오가며 밤을 줍는 모양이다. 인사를 하자 반갑게 맞이한다. 밤을 주으러 왔는데 누가 다 주워가고 작은 것만 남았단다. 밤나무를 보니 많은 밤이 열려있다. 밤이 익어 밤송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제법 커다란 밤이다.
밤을 따 드리려 하니 그럴 필요 없단다. 알밤을 많이 주워 더 필요 없단다. 대신 큰 밤이나 주워 가면서 까먹으란다. 할머니의 손사래에도 다가가 밤나무를 흔들자 알밤이 우수수 떨어진다. 할머니 보자기에 밤을 넣자 할머니가 손사래를 친다. 많이 주워 필요 없으니 얼른 주머니에 넣어 가란다. 그래도 사양을 하니 주머니에 넣어 주신다. 자전거 타다가 쉴 때 까먹고, 다음에 와서 다시 밤을 주워 가란다. 할 수 없이 주머니에 몇 알을 넣고 자전거에 올라야 했다. 오래 전의 어머님이 생각나고 정겨운 할머니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유모차를 끌고 가시기 편하게 길가로 꺼내 놓고 인사를 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밤 주으러 다시 오란다. 남은 밤을 따다 먹어도 상관없단다.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자전거 길, 밤의 계절을 알려주는 아침나절 일들이 떠 오른다. 배낭 가득 채워진 밤을 자동차에 넣고, 산속으로 숨어버린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여유롭게 아내와 산행을 하며 밥을 줍는 다정한 부부를 만났다. 그리고 유모차와 지팡이에 기대어 한 봉지 알밤에도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할머니도 만났다. 모두가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자전거길에 너그러운 삶의 여유를 한 수 배우는 산뜻한 아침이다. 힘겨운 언덕에 앉아 할머니가 넣어 주신 알밤을 까먹어야겠다. 길가에는 울긋불긋한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다. 더없이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가을날의 자전거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