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엔 가을 흔적이 가득하다.

(아침에 만난 정원, 공작 단풍의 품위)

by 바람마냥

햇살이 산을 넘어온 아침, 덩달아 하얀 서리가 찾아왔다. 곳곳에 서리발이 곧추 세우고 있으니 마당에 푸르던 잔디도 어쩔 수 없다. 하얀 옷을 쓰고 태연한 척 앉아 있는 잔디밭에도 가을은 깊숙이 자리했다. 갑자기 찾아온 시골의 가을 풍경, 어쩌면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느닷없는 하얀 서리는 푸름을 한꺼번에 쓰러트려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조짐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어차피 올 서리라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은 붉은 감나무 잎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주황색의 감이 달린 감나무, 거기엔 붉은빛이 물든 잎이 있어야 제격이다. 먹음직스러운 감을 감싼 붉게 물든 감나무 잎이 가을빛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푸르른 하늘 아래 붉은빛 홍시가 바람 그네를 탄다. 붉은 잎에 숨기를 반복하는 숨바꼭질, 거기엔 붉게 물든 잎이 있어야 한다. 시골집 어린아이가 긴 장대를 들고 감나무 밑을 서성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홍시를 따라 눈망울은 연신 바쁘기만 하다. 바람이 잔잔한 틈을 타 홍시를 망태에 담았다. 하늘을 향한 고개는 아프지만 붉은 홍시맛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어린 시절의 감나무에 대한 추억이다. 추운 고장에 있는 시골집에 감나무를 심었다. 추워서 어렵다는 이웃들의 말에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IMG_9950[1].JPG 마지막 남은 감

정성스레 돌본 감나무에 예닐곱 개의 감꽃이 피었다. 감사한 마음에 봄과 여름을 지나는 동안 안녕을 빌었다. 기어이 감이 열린 것이다. 연초록의 열매가 여름을 지나며 제법 몸집을 불렸다.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부끄러웠나 보다. 아내와 번갈아 바라보는 눈길에 몸 둘 바를 몰랐는지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줄어드는 감의 숫자에 아침저녁 동동거렸다. 다행히도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감이 감나무를 지켜주고 있다. 외롭게 감나무를 지키던 한 개의 감이 가을 색을 입었다. 거기에도 감나무 잎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나뭇잎에 숨은 감은 무럭무럭 몸집을 불렸다. 제법 감으로써의 품위를 닮아가며 반짝이는 햇살에 의스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서리가 찾아왔다. 단박에 감나무 잎이 수그러들고 말았다. 붉은빛은 볼 사이도 없이 잎이 말라버림에 잔인한 가을을 원망했었다. 밝은 햇살이 찾아와도 감나무 잎은 본 척도 않는다. 앞 산을 넘어온 햇살에도 감나무 잎은 골이 잔뜩 났다. 며칠 동안 골을 부리던 감나무 잎, 그예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다복하게 행복함을 주던 감나무 잎이 떨어지고 외롭게 한 개의 감이 나무를 지키고 있다. 벌거벗은듯한 감나무엔 외로운 감만이 그네를 타고 있다. 느닷없이 찾아온 가을이 야속했지만 계절의 순환이야 막을 수 있다던가? 순식간에 찾아온 가을 속에도 아름다움은 남아 있었다. 마당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공작단풍이다.

IMG_9569[1].JPG 가을의 손님, 구절초

잔디밭을 양쪽에서 굳건히 지키고 있는 단풍나무, 거친 바람에도 품위가 있다. 느긋하게 아름다음을 자랑하는 공작처럼 서두름이 없다. 바람이 찾아와도 끄떡없고 갑작스레 내린 하얀 서리에도 굽힘이 없다. 하얗게 내린 서리를 훌훌 털어 버리고 품위를 지킨다. 한 번에 주눅이 든 감나무 잎과는 처세가 다르다. 하얀 서리를 훌훌 털어낸 공작단풍, 밝은 햇살이 찾아왔다. 반갑게 맞이한 햇살에도 방정맞음이 없다.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맞이하는 햇살, 산을 넘은 햇살도 멈칫한다. 기어이 햇살을 끌어안은 공작단풍, 붉음의 진수를 보여준다. 진하지도 않고 묽지도 않은 붉은빛, 햇살을 가득 와도 천박함이 없는 느긋한 붉음이다.


마당 끝자리에 자리 잡은 하얀 구절초, 역시 구절초다. 붉음을 빛내는 공작단풍과는 달리 하양을 맘껏 뽐내고 있다. 주저리주저리 피기 시작한 하얀 구절초, 가을의 꽃임을 알려주고 있다. 찬란한 보랏빛을 자랑하던 개미취가 꽃을 거두자 피기 시작한 구절초다. 시골집에 자리를 잡기 전, 집주인보다 먼저 터전을 잡았었다. 거대한 바위틈에 버티고 앉아 느긋한 꽃을 피우고 일렁인다. 작은 바람에도 응답을 하고, 찾아온 햇살도 외면하는 법이 없다. 방끗 웃어주는 눈웃음에 바람도 반하고, 햇살마저 자지러진다. 느닷없이 찾아온 서리발을 계절 따라온 선물이려니 하는 모습에 옷깃이 여며진다. 넉넉한 꽃을 피우고 계절을 즐기는 구절초가 더욱 빛나는 이유이다. 아침에 내려선 아침 뜨락의 가을 모습, 눈에 띄는 반가운 그림 선물이 있다.

IMG_9946[1].JPG 손녀가 그려 준 선물

가을이 내려 올 무렵, 부산에 사는 손녀가 다녀갔다. 제법 키를 불려 당당한 초등학교 2학년 모습이다. 어린 티를 벗어나 자기 의사를 뚜렷하게 표현해 냄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언제나 외갓집을 떠들썩하게 해주는 손녀다. 일이층을 오르내리고 잔디밭을 누비며 좋아하는 손녀다. 떠들썩함이 아쉬운 아파트를 떠난 시골집, 언제나 활기찬 모습이다. 시골집을 찾으면 언제나 그려주는 그림이 남아있다. 햇살 밝은 디딤돌에 앉아 늘 그림을 그려준다. 대문에는 '환영'이라는 글과 함께 멋진 그림을 그려 놓고, 갖가지 자연의 모습을 마음껏 표현해 놓음이 늘 아름다운 모습이다. 마당을 나서며 만나는 그림, 가을 아침에 신선함을 주는 손녀의 선물이다.


계절의 바뀜은 마음까지도 바꾸어 놓는다. 봄이면 봄대로 신비함이 있다. 자연이 살아나 꿈틀거림에 깜짝 놀라고, 여름이면 익어가는 푸름에 숨이 멎는다. 깊어가는 푸름에 눈길이 멎고, 들이치는 비바람에 자연을 업수히 여기지 않는다. 기어이 가을이 왔다. 노랑과 붉음이 적당히 어우러진 색깔을 보여준다. 신성함이 있고 성스러움이 녹아있는 물결이다. 성스런 물결이 마당까지 흘러내렸다. 옷깃을 여미며 숭고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가을이 점점 익어감에 서서히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마음까지 가을 곁으로 오고 말았다. 붉은빛의 수고로움에 감사하면서도 세월의 발걸음에 눈을 흘겨본다. 아침에 만난 갖가지 가을 소식에, 세월의 빠름도 가슴에까지 한 발짝 더 내려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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