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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Nov 22. 2021

무례한 찬바람, 창문을 훅 넘어왔다.

(시골의 아침 풍경, 늦가을 날 해운대 )

새벽을 알아차린 이웃집 닭이 일찍부터 부지런을 떤다. 아침이 왔다고 목을 빼고 우는 수탉, 부지런한 암탉도 덩달아 울어주는 아침이다.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다. 언제나 앞산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이층 창문, 찬 바람이 훅하고 넘어온다. 뿌옇게 변한 안경이 써늘한 공기임을 알아 채린다. 허락도 없이 창문을 넘어온 공기가 심상치 않다. 써늘함을 주지만 상큼함이 숨어 있다. 추위를 안겨주지만 신선함이 묻어 있는 알 수 없는 맛이다. 오래전, 네팔의 사랑콧 전망대에서 맛보았던 히말라야의 공기 맛이다. 어쩌면 이런 맛을 지니고 있을 수 있을까? 아침에 떠 오르는 햇살을 보고 놀라지만, 무단 침입한 공기의 맛에 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맛깔난 공기 덕분에 그냥 있을 수가 없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낮은 안개는 오늘도 부지런을 떤다. 잔디밭에는 하얀 서리로 이불을 해 덮었다. 가으내 필까 말까 게으름 피우던 국화꽃이 서리를 맞았다. 불그레 한 국화에 서리가 내렸지만 의젓한 국화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의젓하다. 자연스레 자란 껑충한 키를 자랑하며 햇살이 떠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햇살이 넘어오면 허락 없이 찾아온 서리를 일러 줄 참이다. 곳곳에서 꽃을 피운 구절초도 의젓함은 여전하다. 가을의 꽃임을 자처하며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지난해에 심어 놓은 수십 포기의 구절초, 어린 구절초는 아직 어리광을 부리며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어쩐 일인지 일찍부터 잎사귀가 말라버렸고, 간신히 꽃만 피며 골을 부리고 있다. 돌 틈 사이에 자리를 잡아서 그런지, 아니면 뒷 힘이 부족해서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아직도 감나무는 한 개의 감을 붙잡고 서 있다. 창문을 넘은 찬바람 덕분에 만나 보는 가을 식구들이다.

붉게 물든 화살나무

오래전, 초가지붕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감나무가 있었다. 초가지붕 위로 불쑥 솟아 오른 감나무엔 언제나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수없이 많이 달린 붉은 감, 곳곳엔 홍시가 감나무의 꽃이 되어 으스대고 있다. 가을 서리가 내릴 즈음, 떫은맛을 안고 있는 감은 서서히 몸집을 불렸다. 한 손으로 잡기가 버겁도록 제법 큼직하게 몸집을 불렸다. 어린 아인 감나무에 올라 감을 따야만 했다. 5일장이 서는 날, 어머니가 장터로 팔러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감을 따서 소금물에 떫은맛을 우려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장이 서고 보따리를 하나씩 머리에 얹은 이웃들이 장으로 나섰다. 어머니도 빠질 수 없는 5일장의 추억이다.

감꽃이 올망졸망 피었다. 

한 개가 달린 감, 지나는 이웃이 까치밥이냐 묻는 말에 전재산이라 했다. 큰 소리로 웃으며 하나만 키웠냐는 물음이다. 일 년 내내 키운 전재산이 이거라는 말에 큰 소리로 웃는다. 초봄에 꽃이 핀 것은 예닐곱 개가 되었다.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더니 하나만 덜렁 남았다. 제 몫을 하려는지 굳건히 자리를 지켜준 감이다.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교대로 들여다보던 감이다. 한 개 달린 감을 따고 나면 허전할 것 같아 아직도 놔두고 보는 감이다.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 덜렁 달려 있는 감이 외롭기만 하다. 언젠가는 따야 하는데 날짜를 잡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좋은 날을 잡아 볼 요량이다. 골짜기에서 바람이 찾아왔다. 덩달아 낙엽이 따라오는가 했는데, 공중에 춤을 추는 무엇인가가 있다. 무엇일까? 벌써? 하얀 눈이었다. 

즐거움을 준 상추와 쑥갓

산간지방에 눈이 온다더니 여기도 산간지방인가 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이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작다. 엊그제 입동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려나 보다. 참, 추운 곳임에는 틀림없다. 대개 11월 20일은 되어야 눈이 오는 고장인데 한 열흘은 일찍 찾아온 것이다. 어서 겨울 준비를 해야 함을 알려주는 아침이다. 우선은 텃밭 배추를 단속해야겠다. 정성껏 키워 온 배추다. 남들은 배추에 병이 들어 야단인데, 아직은 건재한 배추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대추나무와 감나무도 보온 덮개를 해 주어야 한다. 추운 지방의 혹독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골짜기 곳곳에서 낙엽송 무리가 보인다.


낙엽송, 앞산과 뒷산에 가득히 자라는 나무이다. 봄부터 푸르른 잎으로 녹음을 주어 언제나 시원했었다. 가을이 되어 모든 나무가 물을 들일 때, 낙엽송도 예외일리 없다. 진한 주황색으로 물을 들인 낙엽송이다. 바람이 불면 노랗게 물든 잎이 눈가루처럼 흩날린다. 나무 밑에 수북이 쌓인 낙엽송 잎이 푸근한 맛을 전해 준다. 가을을 보내기 싫은지 아직도 나무에 잎이 가득하다. 멀리서 바라보는 낙엽송의 붉은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푸름을 주던 낙엽송이 가을을 맞이해 멋진 모습으로 변신했다. 감히 알 수 없었던 모습이 눈앞에 가득하다. 먼 산에 무더기로 자라 있는 낙엽송에 햇살이 들었다. 멋진 산 그림에 운전대를 놓아야 했다. 길가에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들이대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시골의 멋진 그림이다.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렸다.

아침 창문으로 훅 넘어온 찬바람, 앞산의 모든 냄새가 들어 있었다. 자연의 온갖 냄새를 품고 있었다. 창문 너머에 안개를 가득 품은 찬바람은 멀리 네팔 히말라야의 맛까지 품고 있었다. 무단 침입한 산바람이 히말라야의 파란 하늘을 초대한 것이다. 푸르른 허공 속에 안나프루나가 있었고, 다올라기리가 있었다. 에베레스트, 로체와 마칼루 그리고 칸첸중가가 서성대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에 찬란한 햇살이 다가왔다. 히말라야의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물속을 노니는 어린아이 머리처럼 보여줄 듯 말 듯한다. 눈을 뗄 수가 없는 천하제일의 영화관이었다. 앞산을 넘어온 서늘한 바람이 초대한 히말라야의 풍경이었다. 평생 제일의 과업으로 실행한 배낭여행이 주는 가을 아침의 선물이다.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허공에서 만난 히말라야.

가을이 문턱을 넘을 무렵, 푸르름에 젖어 있던 텃밭도 휑하도록 텅 비었다. 토마토를 붉게 물들였고, 보랏빛 가지를 열게 했으며 배추를 길러냈던 텃밭이다. 갖가지 상추로 기쁨을 주었고, 매운 고추가 온몸을 깜짝 놀라게도 했었다. 작지만 일 년의 땀방울이 젖어든 텃밭이었다. 예닐곱 평의 텃밭은 나름대로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곳곳에서 알찬 채소를 길러 주었으며, 신나는 여름을 만들어 주었다. 주인의 노력에 반하지 않는 텃밭이었다. 끝없는 장맛비로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살아남아야 했다. 상추가 그랬고 쑥갓이 그랬다.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가 한 몫했으며 보랏빛 가지도 든든했었다. 아직도 텃밭에는 투지를 불사르는 식구가 있다. 땅 속에 꽁꽁 숨어 있는 바위취가 있다. 예쁜 꽃으로 유혹하던 무뚝뚝한 취나물이다. 


이웃에 아직 시금치가 싱싱하다. 아직도 남은 시금치는 겨울을 무난히 견디어 낼 것이지만, 푸른 배추는 거둘 때가 되었다. 기나긴 빗줄기를 견디어 낸 배추가 싱싱하게 잎을 불렸다. 메뚜기의 등살에 잎을 보전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꾸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고단한 세월이 지났다. 고갱이가 노랗게 들었으며, 아직은 살을 찌워야 하는 세월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달랑 남은 한 개의 감도 남아 있다. 추위가 찾아오면 자취를 감출 터이고, 가을을 노래하던 국화와 구절초도 삶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겨울을 무사히 지내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 도랑의 물소리도 한 없이 쇠잔해졌다. 계절을 노래하던 도랑물이 왜소한 몸으로 변신했고, 세월의 낙엽이 가득해졌다. 세월이 저만큼 흘러갔다는 징조 이리라. 새벽에 무단으로 창문을 넘은 바람이 세월 속에 숨으려는 늦가을의 추억들을 다 꺼내 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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