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Mar 17. 2022

할아비는 세월의 놀이터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할아버지가 되었다, 봄은 또 오고 있었다)

얼마 전, 부산에 사는 딸아이가 갑자기 찾아왔다. 몹시 열이 나자 기댈 곳이 친청뿐인 아이였나 보다. 이리저리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마치고 아직 친정에 머물고 있다. 몸을 추스르고 있는 딸아이, A형 간염의 잔열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간신히 병을 떨쳐내고 허약해진 몸을 다스리느라 고생 중이다.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 준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깨비 같은 아비였다. 기껏해야 돈 몇 푼 던져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어린 손녀는 3학년으로 진학하지만 코로나가 길을 막아섰다. 원격수업을 진행하며 몇 주째 같이 살고 있다. 놀 사람도 마땅치 않아 늘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며 잘 버텨줌이 고맙기만 하다. 


엊저녁 일이다. 딸아이는 허해진 몸을 추스르느라 놀아줄 여력이 없나 보다. 집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손녀, 저녁에도 늦게서야 잠자리에 든다. 예민한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한다. 에미가 아픈 몸이라 돌봐주지 못해서인지 늘 뒤척인다. 왜 잠이 오지 않는지 할아비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수 있는지 야속하단다. 초등학교 3학년이 하는 말이다. 옆에 누워있는 할아비에게 묻는 손녀, 참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오지 않는 잠을 자려 무단히도 애쓰고 있다. 엄마가 힘들까 봐 떨어져 자는 아이, 내일도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얼른 자야 한단다. 간신히 잠이 든 아이를 보며 내일은 놀이터에서 놀아줄 생각을 해본다. 놀이터에서 놀아주면 쉽게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이튿날, 점심을 먹고 근처 놀이터로 갔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이들도 없다. 거센 골바람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움츠리게 한다. 손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터에서 뛰어다닌다. 그네를 타고 미끄럼을 타며 신이 났다.

물끄러미 뛰어노는 손녀를 보는 마음, 짠하기도 했고 또 대견하기도 했다. 엊그제 옹알거리던 아이다. 긴 다리가 신기했고 팔랑거리는 머리칼이 너무 보기 좋았다. 검은 패딩을 나풀거리며 오가는 손녀, 나도 저런 나이가 있었을까? 무심한 세월을 탓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렀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꾸리는 딸이 되고, 손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하다.  

 

잠시 후, 노부부가 두 손자, 손녀를 데리고 등장하셨다. 나와 같은 처지인가 보다. 손자, 손녀가 노는 모습이 보이는 곳에서 바람을 피해 선다. 손주를 보는 것이 나보다는 고수인 듯했다. 추운 바람에도 아이들을 지키며 서 있는 세 노인(?)들이다. 잠시 후 주위를 서성이는 할아버지를 보고 손녀가 쫓아온다. 다리가 아프지 않으냐며 의자에 앉아 계시란다. 의자에 앉아 바라본 손녀, 어리지만 의견이 멀쩡하다. 할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해 줌이 고맙기만 하다. 아직 어린이라고 생각해 왔던 손녀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할아버지가 안 됐던 모양이다. 손녀와 놀이터를 온 것이 생전 처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가끔이라도 같이 왔었더라면 능숙하게 같이 놀아주는 할아비가 되었을 텐데. 멀리 있는 두 노인은 능숙한 자세다. 


바람이 비켜가는 곳에서 핸드폰과 유유히 놀고 계신다. 부부인 두 사람이 모르는 사람같이 핸드폰과 놀고 있다.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어느 곳이나 대세인 핸드폰, 집이나 길이나 어느 곳에서도 대세였다. 모든 이의 입을 닫고 말았다. 누구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현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할까? 무슨 말을, 누구와 그리도 많이 해야 할까? 언제나 궁금한 생각이다. 신호등을 건널 때도 받아야 하고, 밥을 먹을 때도 봐야 한단다. 나만이 떨어져 사는 외딴섬이다.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손녀는 신이 났다. 두 아이와 어느새 친구가 되어 몰려다니며 놀고 있다. 세 노인(?)에 비해 아무것도 오염되지 않은 어린이임이 부럽기만 하다. 어느 것이나 차례를 지키고 서로가 양보한다. 오랜만에 보는 유쾌한 광경이다. 


손녀를 데리고 처음 나온 어린이 놀이터다. 딸과 손녀 덕에 처음 해본 낯선 경험이다. 남들이나 하는 듯한 어린이 놀이터 나들이였다. 손주와 동행한 어르신들을 보며 한 생각이었다. 손주가 귀여워 그러했을 수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처지라 그리 했을 수도 있으리라. 아직은 낯선 놀이터가 어쩐지 어색하다. 몸짓도 어색하고 머릿 속도 복잡하기만 하다. 몸을 추스르며 새 봄을 기다리고 있는 딸아이, 할아비를 언덕 삼아 놀이터에 놀고 있는 손녀가 주는 생각이다. 새 봄이 오려나 보다. 곳곳에서 작은 꽃망울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딸아이의 마음에도 따스한 봄이 찾아오고, 팔랑대며 놀고 있는 손녀도 에미 걱정 없는 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딸아이의 건강을 바라며 새 봄을 기대해 보는 오후, 이런저런 생각 속을 헤매는 어둑한 계절이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도 많아질까? 자식을 걱정하고 세월을 탓하는 삶이 되었나 보다. 세월은 어느덧 흘러 나도 노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손녀가 귀엽고 사랑스러움은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세월이 넉넉히 흘러, 나도 그리 되었음에 많은 생각이 오간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다니. 세월의 덧없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손녀가 쫓아온다. 날씨가 추우니 그만 들어가자 한다. 내일 날씨가 따스해지면 다시 나오자 한다. 맛있는 것이 생각나면 사주겠다는 말에도 대꾸가 없다. 할아버지가 추으니 얼른 집에 가자는 손녀다. 세월의 덧없음이 아쉽지만 이젠, 흔쾌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사진 속 진실을 그들은 언제나 알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