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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Aug 07. 2020

아버진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의 추억, 2020.02.02일 MBC 여성시대 소개글,보츠와나)

가슴 설레는 설날이 지나면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이 다가오게 된다. 설이 지나면 시골에서는 농사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으로 서서히 농사 준비를 하는 계절이 오게 된다. 이때쯤 되면 한학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를 대문에 크게 써서 붙여 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설이 지나면서 정월대보름이 오기까지 시골 동네는 반은 축제요, 반은 농사를 준비하느라 한참 부적 거리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게 된다.


정월 대보름이 올 즈음이면 어른들은 소위 척사대회라는 윷놀이를 하는 것이 큰 행사였는데, 거기에 대한 상품은 양은 냄비나 그릇 등으로 살림살이에 요긴하게 쓰이는 물품으로 정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보름이 오기까지 동네의 양지바른 마당에 모여 윷을 놀게 되는데, 저마다의 목청으로 윷을 놀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정스럽기 한이 없는 그런 행사였다. 


윷을 놀다 모나 윷이 나오면 걸쭉한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윷을 노는 멍석 둘레를 빙빙 돌기도 하면서 흥을 돋우기도 하는데, 이것을 구경하는 것도 보름 녁에 커다란 재밋거리이기도 하였다. 가끔은 윷놀이를 하면서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막걸리 한 잔 나누며 저절로 해결된다.


이렇게 어른들이 윷을 노는가 하면 아이들은 귀한 깡통에 숭숭 구멍을 뚫어 긴 철사 줄로 끈을 달아 불놀이를 한다. 깡통 안에 불덩이를 넣고 빙빙 돌리는 불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는 연례행사였다. 깡통 안에 불을 피우는 나뭇 감으로는 소나무 가지가 있는 옹이 부분이 가장 좋은 땔감이 되었던 이유는 그곳에 소나무 송진이 있어 불이 잘 붙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솔방울을 넣어 돌리면 휙휙 소리를 내면서 대단한 불이 붙게 되었으니, 모두는 신나게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한다. 이렇게 깡통을 돌리기도 하고, 논두렁에 불을 피우면서 해가 저물면 여지없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시루를 걸어놓고 불을 지피신다. 그것은 새해 농사를 잘 짓게 해 달라는 뜻으로 붉은팥을 곁들인 시루떡을 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떡이 익으면 커다란 접시에 떡을 담아 장독대를 비롯해 부엌과 대청마루에 놓고 정성 들여 치성을 드리는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고 나면 이 떡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이 집 저 집에 나누어 주면서 없는 살림살이에도 넉넉한 인심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행사가 끝날 무렵에 우리는 높은 산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것은 높은 산에서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 달을 누구보다도 먼저 보기 위해서였다. 어린 나이에 특별한 것을 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하기에 높은 산에 올라 달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달이 떠오르기까지의 추운 기운을 달래기 위해 산 정상에 나무를 마련하여 불을 피우기 시작하면, 모든 산꼭대기에서 피어나는 불의 모습은 장관을 연출하게 된다. 모두는 불 옆으로 모여들어 재미있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달이 떠오르게 되면 달을 보고 넙죽 절을 하게 되는데, 어린 나는 무엇을 빌면서 절을 했는지 기억은 없으나 산꼭대기에서 절을 하던 강렬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법석을 떠는 사이 어머니는 집안에서 떡 사발을 놓고 정갈하게 달을 보고 빌었을 텐데 무엇을 그리 간절하게 바라셨을까? 어머니를 회상해 보면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셨으리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무엇을 기도하셨을까? 


언제나 과묵하시고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아버지는 늘 점잖으셨고, 떠들썩한 동네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실 일만 하시는 어른이시었다. 모두가 산으로 어디로 보름달을 맞이하러 나가는 사이에도 어머니가 드리는 떡만 한 접시 잡수시고, 마루에 앉아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셨다.


한참의 침묵 속에 달이 떠오르면, 달을 향해 엄숙한 절을 여러 번 하시는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으나 무엇을 비셨는지를 여쭈어본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언제나 묵직한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할 일만 하신 우리 아버지는, 거대한 보름달을 성스럽게 맞이하면서 과연, 무엇을 기도하셨을까? 아버지, 당신은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MBC. 여성시대 채택 원고(2020.02.02 방송 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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