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간 후, 여름이 준 선물)
현관문을 열고 나선 밤 10시, 찬란한 골짜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앞산 언덕에 자리잡은 벚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짙푸른 녹음을 간직한 잎새가 물방울을 머금고 가로등 불빛에 반짝임이 예사롭지 않다. 영롱함이 튀어나와 골짜기를 밝혀 주는 밤, 화단에 자리 잡은 모과나무 잎에도 반짝임은 내려앉았다. 장맛비에 호사스러움이 골짜기에 찾아온 것이다. 양편에서 반짝임이 자웅을 겨루는 사이, 장맛비로 살찐 도랑물 소리가 경쾌하다. 여기에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시골길이 길게 다리를 뻗었다. 양쪽으로 천수국이 지키고 있는 호젓한 시골길이다. 껑충한 키를 키운 코스모스가 밤바람에 일렁이고, 장맛비가 주고 간 화려한 밤이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길고도 처절하던 장마가 끝이 보이는가 보다. 긴 여름을 독차지하고 있는 손님 아닌 손님이었다. 계절의 변화 속에 살아가면서 언제나 만나야 하는 긴 장마다. 두 달간이나 이어진 긴 장마의 시달림이 떠 올라 올해엔 젊잖은 장마를 기대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중부지방을 오르내리며 곳곳에 생채기를 냈다. 서민들의 서러움이 가득한 장마에 서민들의 삶과 달리 배부른 인간들의 히죽거림은 슬프기도 했다. 눈물 어린 빗속에서 먹거리를 자랑하는 인간이 있었고, 사진이 잘 나오도록 비가 더 오길 바라는 인간 아닌 인간들이었다. 오늘도 그들을 바라봄이 허탈하고도 너무 슬프다. 처절한 장마가 세상을 할퀴고 간 사이 골짜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던 앞 도랑 이야기다. 한결같이 잔잔한 물길로 동네를 흥겹게 해주는 도랑이었다. 언제나 발목이 잠길 정도로 물길을 만들어 주었고, 더위를 한꺼번에 씻어주는 동네의 자랑거리였다. 긴 가뭄으로 도랑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굵직하던 물소리는 어느새 가느다란 저음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오가는 바람소리엔 들리지도 않던 물소리, 장맛비에 어느덧 기운을 차렸다. 우렁찬 목소리를 두음 정도 높여 옹알거림을 시작했다. 한결 컬컬한 목소리로 골짜기를 호령하고 있음에 얼른 발을 담근다. 시원함과 짜릿함을 주는 도랑물이 행복함을 선사하고 있는 사이, 또 힘을 얻은 것이 있다. 가뭄으로 허덕이던 잔디밭이다.
봄부터 계속된 긴 가뭄, 잔디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긴 가뭄 속에 잔디밭에 물을 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근근이 흘러드는 골짜기 물사정이다. 조석으로 잔디밭에 물을 뿌리기엔 이웃에 미안해서다. 긴 가뭄이지만 최선을 다해 자란 잔디밭, 며칠 전 예쁜 이등병 머리로 깎아 주었다. 작은 키의 잔디밭이 앙증스럽고도 평화스러웠는데 긴 장마가 처절하게 짓밟았다. 곳곳엔 물이 고였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잔디가 안타까웠다. 서서히 장마가 물러가면서 물이 빠진 자리엔 푸르른 잔디가 키를 불렸다. 잔디가 큼직한 키를 드러냄에 반갑지만 아직도 머뭇거리는 장맛비다. 장마가 지난 골짜기에 푸름은 여기에도 있다.
봄철에 이르러 시름시름 앓던 소나무다. 언제나 푸르름을 자랑하던 소나무, 잎을 키우지 못하고 있던 소나무다. 어느덧 푸름에 힘을 얻어 화려한 새봄처럼 계절을 즐기고 있다. 싱그러운 봄철에 푸른 잎을 내민 모습으로 여름을 맞고 있다. 소독을 해줄까, 아니면 어떤 방법을 찾으려다 머뭇거린 소나무다. 장맛비를 맞고 소생하기 시작한 소나무, 푸름이 가득하게 담긴 잎이 아름답기만 하다. 마당가를 가지런히 감싸고 있는 다섯 그루의 반송과 시골집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다. 소나무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이 푸름이 가득해진 시골집이다. 장맛비에도 씩씩한 것은 또 있다.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꽃범의 꼬리다. 대단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꽃범의 꼬리다.
꽃범의 꼬리, 꽃핀 모습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고, 꽃피는 모습은 범의 꼬리처럼 길고도 뾰쪽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번식력이 얼마나 좋은지 잔디밭 가장자리를 가득 차지했다. 지난해에도 장마 끝에 엄청난 꽃으로 시골집을 치장했던 꽃이다. 가을의 꽃인 구절초 자리까지 침범하며 세력을 넓혀왔는데, 추근추근 내린 장맛비로 몸집을 크게 불렸다. 그렇지 않아도 번식력이 좋은데 잦은 비에 근육의 힘까지 늘리며 분홍빛 꽃을 피웠다. 분홍빛이 가득한 비비추, 호스타와 어울리며 훤한 마당을 만들었다. 처절한 장마가 지나고 장마의 꼬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인가 보다.
한꺼번에 내리는 거센 장맛비가 아니라 추근대며 내리는 비다. 모든 것을 삼킬 듯이 내리는 비가 지났기에 처마 밑에 내리는 빗소리는 오늘따라 잔잔하다. 지붕을 타고 내리는 잔잔한 빗방울은 아직 그칠 줄을 모른다. 후드득거리는 거친 소리가 아닌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골짜기에 평화를 안겨 준다. 정겨움을 안고 슬며시 찾아오는 애틋한 손님이다. 한참을 그쳤다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는 잊은 듯 찾아오는 아련한 그 소리다. 앞 산에 산바람이 찾아왔다. 녹음에 머물던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투박해도 어쩐지 편안한 소리다. 얼른 창문을 열고 긴 목을 늘여본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명 장면이 나타났다.
뜰 앞에 자리 잡은 버찌 나무가 으뜸이다. 녹음에 묻은 물방울이 하얀 가로등 불빛을 거부했다. 순식간에 튀어 오른 반짝임이 온 나무를 덮고 있다. 뜰 앞에 버티고 있는 모과나무도 빛이 난다. 저녁나절 내린 빗방울이 아직도 남아 하얀빛을 내고 있다. 맑은 빗방울 위에 달빛이 내려왔고, 맑은 빛은 물방울을 딛고 허공으로 달아났다. 다시 내린 달빛은 달아난 빛을 따라 올라 골짜기는 여전히 아름답다. 반짝이는 녹음을 배경으로 은은한 도랑물이 찾아왔다. 옹알거리는 도랑물이 찾아오자 바람이 내려왔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느덧 어울림이 되어 하얀 골짜기가 살아난다. 여기에 개키버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마당가에 조용히 있던 개키버들, 봄을 맞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봄날에 태어난 녹음은 여름이 되어 분홍이 되고, 붉음이 되어 치렁치렁한 치마가 되었다. 바람 따라 흔들림은 운율이 되었고 늘어진 가지는 대지를 덮었다. 긴치마를 감당하기 힘겨움에 적당한 가위질로 재단을 했다. 긴 장마는 치렁치렁한 개키버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내리는 빗방울이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거센 장맛비는 감당할 수 없었으나 쉬엄쉬엄 내리는 가는 비가 반가웠던 개키버들이다. 산을 넘은 바람에 몸을 털어낸 개키버들이 긴 한숨을 내어 쉰다. 장맛비의 여운을 즐기는 골짜기는 신이 났다.
장마가 가고 나면 무더위가 찾아 올 골짜기다. 간간이 찾아온 장마는 여름 준비를 끝내 주었다. 앞산을 검푸름으로 익혀 놓았고, 마당은 꽃범의 꼬리로 가득 채워 놓았다. 가느다란 도랑에 살을 찌워 목소리를 키워 놓았다. 소나무는 힘을 얻어 잎이 푸르고, 푸름을 가득 실은 비비추가 보랏빛 꽃을 피게 했다. 장마가 서서히 물러가면서 꽃범의 꼬리가 분홍빛 꽃을 가득 피웠다. 보랏빛 꽃범의 꼬리에 비비추가 장단을 맞추고, 벌개미취가 보랏빛으로 화답한다. 잠잠하던 매미가 떼창을 불러 주면서 앞산은 녹음은 더 짙어졌다. 이젠, 여름이 점점 깊어지며 가을이 자리를 마련할 테니, 세월은 그렇게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