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결실, 고추가 익어간다.)
시원한 산 바람을 맞으며 시작한 아침은 산뜻하다. 시원함이 있고 상큼함이 있어서다. 아침부터 재잘대는 참새를 쫒느라 손사래를 처도 끄떡 않는 그들이다. 언제나처럼 잔디밭을 둘러보고, 뒤뜰로 가기 위해 창고문을 열어 그대로 둔다. 습기 찬 창고를 상쾌하게 하기 위함이다. 잔디밭을 지나 뒤뜰에 심어진 가을 상추와 배추, 두 포기가 후줄근하다. 밤새 내린 비가 문제였다. 지붕을 타고 내린 빗물이 밤새 괴롭힌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하루만 더 보기로 했다. 고난을 무릅쓰고 일어서면 좋고, 견디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옮길까 생각이다. 한 포기도 소중한 텃밭이다.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린다. 역시 이웃이 닭과 아침인사를 하는 소리다.
닭과 인사를 끝낸 이웃, 고추밭으로 숨어들었다. 무엇을 할까? 아침부터 고추밭을 돌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도 풍성한 고추를 만날 수 있을까? 해마다 해보는 의문이지만, 고수의 농법을 당해낼 수 있다던가? 고추 한 포기에 헤아릴 수 없는 붉은 고추가 일렁인다. 언제나 아침인사를 하는 닭이 길러내는 고추다. 열심히 먹고 쏟아내는 닭의 배설물들이 해낸 위업이다. 아무리 퇴비를 해도 닭의 힘만은 이겨낼 도리가 없다. 말없이 쏟아낸 닭의 배설물은 고추 그리고 상추와 토마토를 우월하게 길러낸다. 주렁주렁 달린 고추가 설명해 주고, 붉게 익은 토마토가 잘 보여주고 있다. 텃밭을 서성이던 아내가 앞치마를 여미고 들어온다.
앞치마에 무엇이 있느냐는 말에 서너 개의 붉은 고추를 보여준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텃밭의 붉은 고추다. 이십여 포기를 심었으니 본전엔 어림없다. 풋고추는 그런대로 수확이 있어 다행이지만, 붉은 고추가 보이지 않는다. 몇 개의 붉은 고추가 익어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기대 수준이다. 문제는 고추밭 앞에 있는 나무들이다. 불당 나무가 있고, 나무수국이 있다. 옆으로는 때죽나무가 떡 버티고 있어 고추밭에 갈 햇살이 없다. 틈을 비집고 드는 햇살을 제외하곤 구경을 할 수 없으니 고추를 탓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나무를 캐 버릴 수도 없어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몇 개의 붉은 고추로 왜 만족할 수 있을까?
맑은 하늘 속엔 붉은 고추잠자리가 맴을 돈다. 허름한 멍석 위엔 붉은 고추가 한가득이다. 붉은 봉선화 꽃이 담장 밑에 졸고 있는 여름날, 세상이 잠자는 듯 조용한 마당이다. 초가지붕에 따가운 햇살이 내려왔고, 허연 박꽃이 가득 피었다. 조용한 시골집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오후, 허연 수건 질끈 묶은 어머니는 홀로 바쁘시다. 따가운 햇살이 내려온 멍석 위 붉은 고추를 뒤적여야 해서다. 잠시 소홀해선 지금껏 정성이 물거품이 된다. 고추를 얇게 펼쳐놓아야 했고 비가 오면 단속해야 했다. 허덕이는 여름날에 돈을 준비할 수 있는 중요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집에 붉음이 어우러지는 가을날의 풍경이다.
초봄에 이르러 언 땅을 파헤치며 비닐하우스를 지어야 했다. 어렵게 만들어진 곳에 고추씨를 뿌려 모종을 길러 어렵게 키워낸 고추다. 무더운 여름날이 계속되며 고추밭은 그득해졌다. 푸름이 넘실대는 고추밭엔 큼직한 풋고추가 그득하고, 내리는 햇살 따라 붉은빛으로 갈아입었다. 모든 일손을 모아 고추를 따고, 아버지의 등짐을 빌려 널어놓은 붉은 고추다. 집안을 꾸려야 하고, 자식들 기성회비를 내야 했다. 공책을 사줘야 하고, 5일장에 비릿한 생선이라도 사야 했다. 오로지 돈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고추였다. 정성껏 돌봐야 하고 끊임없는 손놀림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내는 서너 개의 붉은 고추로 만족해한다.
장마가 오고 갔다. 이웃은 고추에 소독을 하고 영양제를 주어야 한단다. 더위를 마다하고 들통을 메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올해는 소독을 해 볼까? 아내는 올해도 손사래를 친다. 풋고추가 푸짐하고, 고춧잎을 따서 먹는 고추다. 소독을 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붉은 고추는 얻을 수 없다. 소독을 하지 않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열무를 심어 놓면 남아나질 않는다. 벌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앙상한 잎이 애처롭다. 소독을 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야채들이다. 상추나 쑥갓은 병충해가 덜하니 천만다행, 기를 수 있는 채소가 없을 뻔했다.
가까스로 풋고추로 만족하고 고춧잎으로 만족하면 된단다. 붉은 고추는 30여 개 정도면 충분하단다. 냉장실에 넣어 놓고 가끔 하나씩 꺼내 맛을 내면 충분하단다. 내년 봄까지 넉넉한 양이란다. 청양고추이기에 맑고도 시원한 매운맛이 일품이다. 욕심내지 말고 몇 개의 붉은 고추만으로 만족하잖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이웃에선 포대자루로 붉은 고추를 따는데 붉은 고추 개수를 세고 있다. 아내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서서히 고추도 힘을 내고 있다. 벌써 굵직한 몸집으로 불려 놓았고 서서히 붉은빛이 물들어 간다. 얼마나 크고 탐스러운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골짜기엔 가끔 찾아오는 친구가 있고 친지들이 있다. 이젠 삼겹살을 구워야 하는 선선한 가을이 오고 있다.
봄에 심었던 상추가 수명을 다했고, 모든 채소가 시들해졌다. 가을 입맛을 돋우려 가을 상추를 심었다. 추석 무렵 겉절이를 해 먹을 요량으로 가을배추도 심었다. 작지만 푸름이 가득하게 심어 놓은 텃밭이다. 얼마 지나면 상추 잎이 넉넉해지고, 배춧잎도 넙적해질 것이다. 넉넉한 풋고추에 가끔 달린 붉은색이 조화롭다. 삼겹살을 구며 상추를 따오라 한다. 풋고추에 붉은 것도 따오라 한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시원함에 얼굴색이 달라진다. 어째 이런 맛이 나올 수 있느냐 한다. 붉은 고추는 넉넉히 얻을 수 없지만, 풋고추가 넉넉하고 상추와 배추가 풍성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다. 코스모스가 빨강 꽃을 피우고, 고추잠자리 마당 위를 맴도는 날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다. 풋고추와 상추로도 충분한데 산바람까지 가득한 밥상, 이보다 더 좋은 성찬이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골짜기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