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도 '시월의 마지막 밤'이 또, 찾아왔다.

(작은 놀이터 방문, 색소폰 연주실)

by 바람마냥

골짜기 마을로 이사 오기 전, 대략 20여 년 전 일이다. 무슨 악기든 해보고 싶기도 했고, 감히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음악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뜬금없이 색소폰을 구입했다. 세상에 태어나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통기타가 유행했던 학창 시절엔 통기타야 만져봤지만, 그 후론 생각도 그리고 짬도 없었던 삶이었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구입했던 색소폰은 오랫동안 뒷방에 묵혀 놓아야 했다. 직장을 잡고 살아가기 바빠서다. 부잣집 사람들만의 놀이라고 생각했었던 악기 연주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점차 세월이 흐르고 조금은 여유롭게 되어 용기를 냈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여기저기에 기웃거리며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곳곳의 연습장소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연습 장소도 쉽지 않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하면서 어렵게 동호회를 찾았다. 10여 명이 꾸려가던 동호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피나는 노력과 어려움을 겪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설프게 시작한 색소폰 연주가 은퇴 후의 삶에 큰 재산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음악실을 마련하고 동호회원들과 어울리며 삶의 공간을 만들어 나갔다. 쉼 없는 노력으로 연습을 하고, 연말엔 연주회를 한다. 벌써 13년 차다.


지하공간에 있는 연습실은 대략 30여 평으로 10여 명이 즐기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음향시설과 개인연습실이 마련되어 있고, 합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드럼도 갖추어져 있고, 간단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회원이면 언제든지, 무한정 즐길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평소엔 각자 연습을 하고, 일요일엔 전문 강사가 두어 시간 합주를 지도해준다. 연말 음악회와 각종 대회를 참가하기 위한 레슨이다. 새벽에 오는 회원도 있고, 점심때 오는 회원도 있다. 저녁식사 후 찾는 회원도 있어 가끔은 근처 소주집을 찾기도 한다. 연주를 하고 난 후의 간단한 소주 한잔, 언제나 색소폰 이야기로 즐거운 술자리다. 10여 년 전부터 운영해오는 음악실엔 갖가지 사연도 있는 곳이지만 지하공간이 갖는 어려움도 있다.

IMG_2429[1].JPG 악기 보관함

우선은 습기와의 전쟁을 해야 한다. 습기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악기이기에 늘 신경을 써야 한다. 여름이면 제습기와 환풍기를 이용해 습기를 제거하며, 수시로 환풍으로 공기를 순환시킨다. 다른 지하공간에 비해 습기가 적은 편이기에 다행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이점도 있는 지하다. 음악실엔 아픔과 애환이 있기도 하다. 어느 여름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였다. 우연히 음악실을 찾은 회원의 다급한 전화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음악실에 물난리가 났단다. 옥상에서 쏟아져 내린 물, 여지없이 지하공간으로 밀려들었다. 간신히 물길을 막아 바닥만 적시고 말았지만 습기와의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모든 회원이 동원되어 습기를 닦아내며 말리기를 일주일, 간신히 음악실을 보존하게 된 사연이다. 거대한 난방기구를 대여해 일주일을 가동했다. 회원들이 상주하며 제습을 했다. 장맛비의 어려움 속에 단단해진 동호회원들은 언제나 가족같이 살아간다.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술자리가 즐겁다. 혼사가 있으면 축하 연주도 해주고, 출장 연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딸과 아들의 혼사에 축하연주도 당연히 동호회원들과 했다. 가족과 친지들이 깜짝 놀란다.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아빠의 연주라 한다. 각종 색소폰 대회에도 출전하여 상금을 받는 행운도 있고, 여름이면 하계수련회를 겸해 신나는 야유회를 한다. 언제나 가족과 같이 보살피며 즐기는 공간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 언제나 의견이 일치할 수 없다. 가끔은 마음이 맞지 않아 탈퇴하는 사람도 있지만 합주에 반해 동호회를 꾸려 나간다. 일 년간 회원들이 모여 연습을 하고, 연말 가족음악회를 한다. 평소 연습을 하고, 연말 연주회를 기획 및 연출을 해서 사회까지 맡아 진행한다. 진행순서를 비롯해 리플릿과 현수막을 제작하며 연주회장을 예약부터 종료까지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대부분은 직장인들이어서 손수 맡아하는 일이지만, 한 사람이 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하기에 불평 없이 진행하는 편이다. 동호회원들과 힘을 합해 시에서 운영하는 예술의 전당 공연장을 이용해 음악회를 한다. 볼일이 있어 시내를 나오면 반드시 찾는 곳이 음악실이다.

IMG_E2557[1].JPG 결혼식 축하연주

아무도 없는 30여 평의 공간이 고요하다. 호젓한 음악실에 홀로 앉아 있다. 악기 보관함에서 악기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연말 연주회 준비를 위한 악보가 가득 쌓여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 내가 이 악보를 보며 연주를 한다고? 생각도 못했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수학을 가르치던 사람이 음악을 한다고? 그것도 연주를 한다니 대단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요즈음 연습곡은 대단한 음악가,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이다. 신이 나고 짜릿함을 주는 곡이다. 16명의 회원이 테너 파트와 알토 1,2부로 나뉘어 내는 소리는 환상적이다. 도레미도 모르던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 아닌가? 가끔 환상 속에서 하는 생각이다.


색소폰을 꺼내 합주 연습을 한다. 나이 들어 젊은 친구들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남의 소리에 폐가 되면 안 되기에 열심히 해야 한다. 올해는 연주회를 독특하게 기획했다. 독주를 줄이고 듀엣이나 트리오 연주를 많이 주문했다. 여기에 드럼과 베이스를 곁들여 웅장한 연주회를 기획하고 있다. 드럼과 베이스는 친지의 힘을 빌리고, 여기에 신시사이저까지 더해지면 화려한 음악회가 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드럼 연주를 한곡쯤 해보면 어떨까도 고심 중이다. 오래전부터 연습해온 드럼이다. 여러 회원들의 연주회 사정을 고려해 화려함보다는 실속이 있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음악회를 준비해야 한다.


합주 연습과 연말에 연주할 곡을 연습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음악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에 시작한 색소폰 연주가 노년의 삶에 즐거움이 되고 있다. 덕분에 시골집 지하실에도 연주공간을 마련했고, 이층 서재에도 연주할 수 있는 기본 준비가 되어 있다. 글을 쓰다 심심하면, 그림을 그리다 생각나면 연주를 한다. 오늘이 시월 말,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생각나 악보를 뒤적인다. 골짜기에 소프라노의 가냘픈 음색이 울려 퍼진다. 누구를 기다릴 필요도, 방해받을 필요 없이 나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올해도 연말 연주회가 며칠 남지 않았다. 연말 연주회 준비를 마음껏 해주었으면 하는 음악실은, 오늘도 꼭 들러야 하는 나의 소중한 사랑방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