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아침 풍경,뜰앞에서 만난 풍경)
아침 공기가 서늘함을 넘어 싸늘한 골짜기다. 바람 따라 앞산의 가을이 소곤대고, 이웃에선 겨울 준비 소리가 요란하다. 겨울을 데울 장작 패는 소리다.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도 남는 소리다. 아, 겨울이 오는 소리인가 보다. 오래전 아버지 고단함을 주던 장작이었다. 나무를 베어 오고 한 나절의 도끼질을 해야 했던 장작이다. 가족의 겨울준비를 홀로 하는 아버지, 따스함을 얹어주기 위한 당신의 노고가 성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다. 웅장한 기계음이 고단함을 대신하는 골짜기의 울림이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며칠 동안 계속될 소리니 정겹게 들어줘야 한다. 곳곳에서 가을을 정리하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밝은 햇살을 찾아 떠난 자전거 길, 가을을 맞이하러 떠났던 길에도 지는 가을이 역력했다. 나무도 몸을 지탱할 만큼의 잎만 두고 겨울을 준비한다. 한잎 두잎 제 몸을 떨구어 내는 현명함과 냉정함을 알게 한다. 눈물겹게 키워낸 잎을 가을로 물들이고 있다. 연초록을 넘어 검푸름으로 정을 담은 잎새였다. 거센 여름 장마를 거뜬히 넘긴 잎새들, 기어이 찾아온 가을바람에 깜짝 놀랐다. 정신없이 살아온 한 해를 마무리하고 가을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서서히 겨울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골짜기 식구들이 서둘러 나섰다. 일 년 내 가꾼 가을을 마무리하고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긴 여름을 버틴 들깨가 곳곳에 누워있다. 흰 수건 질끈 묶은 아낙네가 들깨를 심었다. 긴긴 밭고랑에 장맛비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어이 뿌리를 내린 들깨는 푸르름을 과시하더니 어느새 누런 잎새로 탈바꿈했다. 그 사이에 찾아온 가을은 농부의 발길을 서두르게 한다. 힘겹게 들깨를 베어 언덕 위에 펼쳐 놓았다. 찾아온 햇살의 힘을 얻고자 함이다. 서서히 내려온 햇살은 비탈에 누운 들깨를 어루만졌고, 드디어 깨를 털어야 했다. 작은 한 알이라도 튀어 나갈까 걱정하며 깨를 터는 아낙이다. 참, 누가 저렇게도 작은 들깨를 알아냈을까?
고단함으로 만든 멍석 위에서 하던 일이 달라졌다. 널따란 포장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거대한 농기계들이 일을 하지만, 깨를 터는 일은 정겨운 모습이다. 남편이 모아 놓은 깨를 아낙이 털고 있다. 작은 부주깽이로 두드리는 모습이 오래전 내 어머니다. 저기에 허연 수건만 두르면 영락없는 내 어머니 모습이다. 곳곳에 깨를 베고 터는 모습에 가을을 알게 한다. 며칠 전에 시작된 벼베기도 한창이다. 내 아버지 등짐을 빌려야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거대한 기계가 부지런이 오가며 대신한다. 오랜 기간 서둘러야 했던 일도 순식간에 해결되고 만다. 들판에 앉아 맛깔나게 먹던 한 끼가 그리워지고 이웃이 생각나는 벼베기다.
지나는 길에 만난 소나무도 겨울을 준비했다. 날씬하게 가지를 정리해 준 모습이다. 바람과 햇살이 통해 병충해를 방지하고 소나무 모양을 잡아주기 위함이다. 바람 소통이 원활하고 햇살을 풍부해 건강한 소나무를 만들 수 있다. 곳곳에 소나무를 말끔하게 정리한 모습이다. 소나무의 성장이 멈춘 시기를 택해 전지를 한다. 간편하고도 단순한 삶을 보는 것 같아 시원하기만 하다. 저런 모양으로 살 수는 없을까? 늘 간절함이 배어 있지만 실천하지 못함에 어리석음을 알게 한다. 왜 그렇게도 끌어안고 살아갈까? 갑자기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 떠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人無百歲人이나 枉作千年計가. 백 년을 살 수 없는 인간, 천년을 준비한다던가!
얼마 전에 뜰에 있는 소나무 전지를 해 주었다. 서투른 솜씨로 해 놓은 소나무의 시원함에 마음까지 산뜻했다. 어떻게 전지를 할까? 전문가에게 묻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면서 전지를 했다. 전문가에게 어려운 일이 선무당에겐 단순했다. 인간의 삶과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타인에 방해가 되지 않고, 사회적인 규범에 어우러지는 삶이어야 한다.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다. 소나무 가지도 이웃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에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 가지 성장을 방해하거나, 전체적인 어우러짐이 불편한 가지를 정리해 주는 것이었다. 길가에 소나무도 가을 준비를 끝냈다.
따갑게 내려온 햇살이 들판을 적시었다. 누런 들판, 황금 들녘이라는 말이 맞다. 정말 맞는 말이다. 멀찍이 눈에 들어오는 현수막이 보인다. 쌀값이 폭락해 살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누런 들판에 펄럭이는 현수막이 오늘의 현실을 알게 한다. 소비량이 부쩍 줄어든 쌀, 현명한 인재들 덕에 늘어나는 쌀의 생산량이다. 쌀의 소비가 부쩍 줄었단다. 분식을 장려하고, 보리밥을 먹으라던 기억이다. 도시락 검사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얀 쌀밥을 먹을 수도 없었지만 먹지 말라했다. 도시락 위엔 검은 보리쌀로 덮어야 하는 부자들의 고충이 있었다. 세월이 변했음을 누런 들판이 알려준다. 어떻게 농부들의 외침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널따란 들판을 오고 가는 콤바인이 보인다. 거대한 컴바인은 농부의 현실을 알고 있을까? 이웃의 정이 담긴 오래 전의 이야기가 그리워진다. 논두렁에 앉아 점심을 얻어먹던 기억, 이웃과 품앗이로 벼를 베던 추억이다. 널따란 광주리를 이고 오던 어머님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힘겹게 이고 오는 광주리를 받으러 흙발로 뛰어가던 아버지다. 누런 두렁 콩잎이 나풀대는 논두렁에 앉아 먹던 가을날의 성찬이었다. 하얀 쌀밥에 기름이 반짝이는 김이 있었다. 고소한 콩나물무침이 있었고, 고추장 발라 구운 청태가 있었다. 운이 좋으면 돼지고기 찌개가 있었다. 어찌 그렇게도 맛이 있었을까?
노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 한잔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자전거에 올라 기억해보는 그 시절의 추억이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페달을 밟아 본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들판을 달려간다. 덩달아 파도치는 누런 들판이다. 야, 저런 모습을 아직도 만날 수 있음이 행운이다. 시골에서 만났던 오래 전의 추억을 간직한 행운아다. 그리움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있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가을날의 들판에서 기억해 보는 그리운 얼굴이다.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는 들판, 얼마 지나면 휑한 들판에 싸늘함만이 가득하리라. 가을이 뒷걸음질 치며 덩달아 오려는 겨울을 준비하는 골짜기, 오늘도 오래 전의 기억을 되찾아 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