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밤, 꽃잔디와 영산홍)
봄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추위가 머뭇거리는 골짜기다. 아침나절 비가 오는 듯하더니 햇살이 찾아오기도 하고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 봄빛이 완연하면서 작은 텃밭이지만 발길이 잦아졌다. 며칠 전에 식구들을 맞이했던 채소밭은 간밤에 내린 비로 흐뭇해한다. 우선은 쑥갓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연의 신기함에 오늘도 깜짝 놀라고 만다. 엊그제 물을 흠뻑 주며 심었는데도 시들했었다.
생명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잎을 흔들고 있다. 파릇한 쑥갓이 싱싱함을 자랑하고, 케일도 뒤지지 않는다. 갖가지 상추는 보란 듯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싱싱한 케일은 벌써 상처를 입었다. 크지도 않은 잎을 벌레한테 들키고 만 것이다. 벌레가 먹고 남는 것을 먹는다는 생각이지만, 작은 잎에 구멍을 내놓은 벌레가 야속하기도 하다. 언제나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곳곳을 살펴봐도 찾을 길이 없다. 어디로 갔을까? 잎을 갉아먹은 벌레는 잎과 같은 색이 되어 발견이 어렵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어 이내 포기하고 만다.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고요함을 덜어낸다.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한가로운 골짜기다. 자그마한 봄비가 남기고 간 소리가 골짜기를 적시고 있다. 골짜기 고요함 속에 홀로 남아 있다. 이웃도 마실을 갔는지 조용하고, 하늘길을 오가는 새들도 잠잠하다. 긴 전깃줄이 텅 비어 있다. 오늘따라 집을 짓던 참새들도 찾을 길 없고, 이웃집 닭들도 조용하다. 긴 가뭄에 가늘어진 도랑물도 조용히 할 일만 하고 있다. 봄이 찾아온 골짜기, 고요함 속이지만 곳곳에서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은 꽃잔디가 꼼지락 거리더니 붉게 꽃을 피웠다. 지난겨울을 견디며 죽은 듯이 숨어 있던 꽃잔디다. 봄빛을 받으며 서서히 푸름을 회복하더니 줄기가 살아났다. 서서히 기력을 회복한 꽃잔디가 그예 꽃을 피운 것이다. 아직도 덜 푸른 잔디밭 가장자리를 휘황찬란하게 밝혀주고 있다.
지난봄에 심은 앵두나무도 붉음과 분홍 꽃을 피웠다. 오래 전의 대중가요 덕인지, 우물가하면 생각나던 앵두나무다. 오래 전의 추억이 그리워 심은 앵두나무다. 지난해엔 심통이 났는지 골을 부리며 묵묵부답이었다. 간신히 잎만 보여준 앵두나무가 분홍꽃이 가득 피웠으니 앵두를 보여줄까 기대되는 봄날이다. 자그마한 옹달샘 같은 이웃집 우물가엔 앵두나무가 있었다. 꽃이 피어난 후, 무심히 넘기 세월이 빨강 열매를 한 아름 달아 놓았었다. 빨갛게 물든 앵두나무, 마치 빨간 꽃을 피운 모양새였다.
조용히 꽃을 피운 앵두나무 옆엔 해당화도 있다. 붉게 피는 해당화는 번식력이 대단하다. 땅속을 파고들며 뿌리가 번져 나갔었는데, 어느새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곳곳에서 불쑥불쑥 솟아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빨간 꽃으로 추억 속의 '섬마을 선생님'을 추억하게 할 것이다. 우물가에는 취나물도 벌써 나타났다. 지난해부터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던 취나물이다. 이웃집에 자리 잡았던 취나물 씨가 날라 온 모양이다. 곳곳에서 작은 싹을 내밀더니 곳곳에서 향을 품어낸다.
몇 해 전 뒷밭에 심어 놓았던 곰취도 싱싱한 얼굴을 보이고, 앞마당엔 참취가 싹을 틔운 것이다. 참취, 신선한 잎을 솎아 무쳐 먹는 맛을 떨칠 수 없다. 삼겹살과 어우러지는데도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쌈채소다. 수도가를 맴도는 참취향이 가득한데, 취를 논하다 보면 바위취도 빠질 수 없다. 거대한 바위를 감싸 안은 바위취다. 푸름이 아름다워 두고 보는 바위취, 세월이 지나면 하얀 꽃으로 손을 흔든다. 자연의 신기함을 그예 보여주는 바위취에 돌단풍도 봄을 노래한다.
처절한 바위틈에 자라집은 돌단풍이다. 초봄에 여린 싹이 나오더니 어느새 소박한 하얀 꽃을 피웠다. 푸릇한 잎이 무성해지고, 케이크 위 촛불처럼 꽃을 피웠다. 하얗지만 소란함 없는 소박함으로 무장한 돌단풍이다. 봄날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골짜기다. 빨강 꽃잔디 위에 영산홍도 서서히 피어나고 있다. 아직은 서늘하지만 비올라와 앵초, 금낭화가 봄을 축복하는 골짜기에 작은 봄비가 찾아왔다. 가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계절이다. 지난밤에 내린 봄비는 훌쩍 지나갔지만, 자그마한 물방울 소리가 동네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갖가지 꽃들이 고요함 속에도 소란하다. 작은 초록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성질 급한 꽃들이 활짝 웃고 있어서다. 우선은 수선화가 선봉장으로 자처했고, 붉은 튤립이 꽃을 피웠다. 여기에 비올라와 금낭화 그리고 앵초가 활짝 꽃을 피웠다. 곳곳엔 제비꽃이 보랏빛을 자랑하고 있고, 맑은 노랑을 자랑하는 황금낮달맞이 꽃도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 곳곳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꽃들이 조용함 속에서도 부지런을 떨고 있는 골짜기의 봄날이다. 더 봄날이 되어 맑은 햇살이 찾아온 날, 온 마당에 갖가지 꽃들이 활짝 웃어 주면 골짜기는 훨씬 화려할 것이다. 고요함 속에 찾아온 계절은 오늘도 골짜기에서 신나게 박수를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