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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l 22. 2023

이런저런 생각에 잠들지 못했다.

(처절한 학교 현장, 사진출처:인터넷)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소도시에 발령을 받았다. 먹고 살기보단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시절이다. 엄청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어울림이 좋았다. 아내와 맞벌이를 했기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만은 아니라고. 어찌어찌해서 입학하게 된 사범대학, 여기서 가르치는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해볼 만한 일이라는 것을.


친구를 따라 야간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으고, 가르쳐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학교였다. 아이들 가르침에 하숙비를 털어 넣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도 있음을 실감하며 어쩔 수 없는(?)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군대를 마치고 중소도시로, 조금은 큰 도시에서 고등학교 아이들을 맡아 지도했다.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해 아이들, 학부모 그리고 학교가 혼연일체가 되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공부만 시키던 시절이었다. 


일요일도 토요일도 없는 출근은 근무수당도 있지 않았고, 수고한다는 인사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오로지 아이들 진학을 위해 세월을 털어 넣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방학도 일주일이 되질 않았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 대학진학을 시키는 것이 삶의 목표인 듯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아이들을 지도했을까? 먼 훗날엔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었다. 가정일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으며 아이들만 가르치던 시절 이야기다. 순환근무제도에 따라 시골에서 근무하던 세월은 꿈같던 삶이었다.


궂은일을 서로 하려는 아이들, 어떤 일을 시켜도 불만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가정은 완전하지 않아도 삶만은 충분히 완전한 듯했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삶이었고, 어디 하나 나물할 곳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소풍날, 김밥을 싸 올 형편은 되지 못해도 교사가 주는 김밥을 감사히 먹을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세상엔 이런 아이들도 있구나! 몸이 불편해 몸을 씻지 못하는 친구를 손수 씻어 주던 아이들이었다. 감히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순환근무를 마치고 도시로 복귀했지만 오래 전의 생각은 아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중요하다는 고3학년 교실, 첫 시간부터 깜짝 놀랐다. 교실에 들어서자 2/3 정도는 잠을 자고 있다. 시작종이 울려도 전혀 반응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깨우지만 전혀 반응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수밖에. 수업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이었고, 쉬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엔 몇 명만 바라보며 수업을 해야 했다.


가끔은 잠을 자 줘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업을 할 수 없어서다. 깨워 놓으면 수업을 할 수 없도록 시끄럽게 한다. 주의를 주면 눈을 부라리고, 조용한 것은 몇 분이 가질 않는다. 교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개도 없었다. 오로지 잠을 자주는 것만이 고마울 뿐인 아이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교실의 현실이었다. 야, 이젠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이제 현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출근하면서 고민했고, 퇴근을 하면서도 망설였다. 할 수 없이 저학년으로 가르침을 바꾸었지만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잠을 자기 시작하면 점심때가 되어야 일어 났다.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잠을 자기 위해 등교했고, 학원 숙제하러 등교했다. 학부형과 통화를 했다. 아침부터 잠만 자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학부형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냥 자게 두면 안 되겠느냐고!


현장에 있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르침이 필요 없고 지도가 소용없는 현장이었다. 하교 후 교실엔 교과서가 널브러져 있고, 시작종과 끝나는 종이 필요 없는 현장이었다. 학교는 졸업장을 위한 곳이었고, 학원을 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쉼터였다. 기어이 현장을 떠나는 것만이 내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었다.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받아들임이 다르지만, 나는 현장에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가르침이 필요 없는 곳에 가르치려는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랄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위대한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하는 말은 끝없는 잘남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말이다. 그토록 허물어지도록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끝없는 노력과 인내로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을 마음껏 가르치고 싶었던 사람이다. 현실은 전혀 달랐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과 부딪쳐야 했다. 어떻게 버틸 수가 있을까? 우리의 현실은 터무니없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직도 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대단하신 선생님들을 존경하며 또, 응원합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나라, 고인이 되신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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