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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Dec 14. 2023

나는 어느 계절에 살고 있을까?

(초겨울에 만난 생각)

새벽 운동을 나서는 골짜기는 싸늘하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하얀 서리가 내렸고, 차량 유리는 앞을 보는 역할을 잃고 말았다. 초겨울 청춘이 망설임 없이 나서는 이유는 땀 흘린 하루는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가벼워서다. 따스한 이불속을 싫어할 리 없지만 늙어가는 몸뚱이를 건사하려면 이 정도 초겨울 추위는 감수해야 한다. 


비탈밭과 들판에도 하얀 서리가 내렸다. 초겨울 풍경이 가득한 들녘을 내려가는 아침, 나는 어느 계절에 살고 있을까? 며칠 동안 생긴 일과 나의 삶이 겹쳐지는 아침이다.


오래전부터 아내와 함께 수채화를 하고 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일거리로 화실을 드나든다. 은퇴 후의 더없는 놀잇감으로 일 년간 그림을 그려 새봄에 전시회를 하는 즐거움을 떨칠 수 없어서다. 그림과는 어울리지도 않고 소질도 없는 사람이 늦게라도 서두르길 잘했다는 수채화다. 


얼마 전 화실에서 처음 보는 수강생을 만났다. 수채화를 배우러 온 여자 어르신, 일흔에 가까운 사람이다. 걸음걸이가 불편한 몸이지만 수채화를 하러 찾아오셨다. 기초부터 직선을 그리며 수채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 이제서라도 배우려는 어르신을 보며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낯선 전화를 받았다. 오래전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색소폰 동호회, 회원들과 연습실을 빌려 합주 연습을 하며 연말에는 색소폰 연주회로 일 년을 마무리한다. 연습실 외벽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보고 한 전화였다. 색소폰을 배울 수 있느냐는 전화,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였다. 예순은 넘었을 것이고, 은퇴 후에 소일거리로 배우고 싶어 하는 전화일 것이리라. 예상대로 일흔이 훨씬 넘으셨고, 이제라도 색소폰을 배워 부부가 연주를 하고 싶어 전화를 했단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흔 가까운 화실의 어르신은 어떻게 버티며 살아 내실까? 기어이 인내하시며 멋진 수채화를 기대하고, 어르신의 아름다운 색소폰 연주를 바라지만 선뜻 내키지 않음은 부인할 수 없다.불편한 몸으로 수채화를 하려는 어르신과 쉽지 않은 몸짓으로 색소폰을 배우려는 초겨울 속 청춘들의 도전을 열렬이 응원한다. 


싸늘한 계절이 겨울로 치닫고 있는 아침, 나는 어느 계절에 살고 있을까? 다행히도 조금은 서두른 부지런함에 결실을 즐기는 초겨울쯤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고희를 넘겨 어설프지만 색소폰을 연주하고,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새 봄 전시회를 꿈꾸며 연말 연주회를 준비해야 한다. 다시, 이 겨울을 잘 살아내야 새 봄을 맞이할 수 있으니 어떻게 늙어가는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까?


찬 바람이 부는 아침, 어렵지만 온몸을 온전히 보전해야 내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늦었지만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고 또 수채화를 그릴 수 있다. 아직은 움직일만한 몸이기에 근육을 만들어야 하고, 어설픈 몸동작이라도 움직여야 서리발 가득한 골짜기 속 찬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 하루하루가 건강하게 이어지면 찬 겨울도 버틸 수 있고, 돌아오는 새봄을 쉬이 만날 수 있으니 어서 체육관으로 가야한다. 늙어가는 청춘들의 수채화가 빛이 나고, 색소폰 소리가 울려퍼지기를 기대하는 아침이다.


누죽걸산,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친구의 건배사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돌아오는 새봄에 배추 농사를 짓고, 색소폰을 연주하며 수채화를 그리려면 추운 겨울도 '누죽걸산'을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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