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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Apr 22. 2024

원래는 그들의 삶의 놀이터였다.

(초봄에 만난 골짜기)

초봄이면 골짜기는 언제나 시끄럽다. 골짜기 원 주인이 난리를 치기 때문인데, 시도 때도 없다. 시위인지 평소의 삶인지 모르지만 아침저녁으로 어지럽다. 처마밑에 집을 지으려는 새들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겨우내 조용하던 처마밑에 각종 검불을 물어 나르며 소란스럽다. 검불도 모자라 배설물을 쏟아 놓는 모습에 늘 불편했지만 이젠, 함께 사는 이웃인양 살아간다. 오늘도 새벽부터 할 말이 많은 새들이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을까?


전깃줄에 앉아서도 지껄이고, 날면서도 재잘댄다. 잔디밭에 앉아 먹거리를 찾으면서도 조잘조잘, 나뭇가지에서도 어김이 없다. 가끔의 생각이다. 입이 하나이기 망정이지 두 개였으면 어찌했을까? 새봄이 찾아왔다. 삶을 이어가려는 갖가지 산 식구들이 찾아온다. 참새는 처마밑을 점령하려 서두르고, 산까지도 산란을 위한 준비에 바쁘게 날아든다. 어디다 집을 지을까? 늘 그들의 관심사다. 이층 서재 앞에 있는 처마밑, 새들이 찾아오는 좋은 집터인가 보다. 어째서 이곳을 그렇게도 좋아할까?

햇살이 밝아서일까? 아니면 풍수지리가 좋아서일까? 언제나 손을 뻗어 손사래를 쳐도 소용이 없다. 할 수 없이 등장한 바람개비, 처음에 머뭇거리던 새들이다. 며칠이 지나자 어림도 없다는 듯이 바람개비와 놀자 한다. 바람개비 지지대에 앉아 있는 새들이다. 누가 새대가리라고 했던가? 어림도 없는 소리임은 벌써 깨달았다. 산란기엔 포악해지기도 한 산까치, 화가 나면 사람을 위협한다. 낮게 날면서 위협하기도 하는 산까치는 바람개비와 놀자 한다. 전혀 상관치 않으며 제 할 일을 한다. 아내가 심어 놓은 블루베리, 수확은 포기하고 말았다.


비싼 나무값에 퇴비를 준비해 심어 놓은 블루베리다. 나무가 정착을 하고 열매를 맺자 산까치가 그냥 두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망을 씌워보려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입구를 찾아 따내곤 한다. 이내 수확을 포기하고 새들의 몫으로 남겨 놓고 말았다. 어느 날,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깜짝 놀랐다. 빨간색의 우편함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차린 것이 아닌가? 어느새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하려 하고 있었다. 언제나 조심스레 드나들며 새들의 삶을 보살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새들의 터에 인간이 들어와 살고 있는 골짜기다. 새들에게 조금이나마 예의를 표함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내어 새집을 만들기로 했다. 판자를 구하고 도구를 꺼내 놓고 작업을 했다. 판자를 자르고 못을 박으며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기어이 색칠을 하고 나무에 고정시켰다. 밝은 초록 위에 앉은 주황색의 보금자리, 그들은 나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나무에 자리 잡은 지 며칠이 지나면 보금자리를 찾아올지 알 수가 없다. 빨간 우체통에도 보금자리를 차렸으니 초록이 짙어지고 잔잔해지면 보금자리를 찾아올 것이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연한 초록에 눈이 어둡다. 야, 이런 빛깔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연초록이 지천이고 하양에 보랏빛이 가미된 빛깔이 햇살에 반짝인다. 내리는 봄비가 따스하고, 찾아온 햇살이 더 반가운 골짜기다. 벌써 도랑물은 몸집을 불렸고 불어오는 산바람에 벚꽃이 흩날린다. 텃밭에 심은 상추는 푸름을 가득 먹었고, 가장자리에 터를 잡은 강낭콩이 삐죽이 올라오는 아침이다. 초록의 나무 위에 앉은 주황빛의 황금 보금자리, 어디에도 만날 수 없는 새들의 일등 아파트다. 초록이 짙어지는 날, 여기에서도 재잘대는 새끼를 보고 싶다. 황금빛 둥지에 알 낳고, 부화하는 삶의 보금자리를 차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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