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의 작은 산행 2)
세월의 흐름 속에 연초록이 검푸러지면, 눈 아래 들판도 검푸른 물결이 된다. 시원한 바람이 들판을 뒤 흔들면, 어머님의 추억은 하얀 홑이불처럼 되살아난다. 녹음이 더 우거져 산 식구들 가득해지면, 뒷동산은 시끌벅적해 한나절에 찾아도 햇볕을 피할 수 있어 좋다. 여기에 오고 가는 길손 늘어 좋은데, 묵직한 산악자전거의 버거움을 어떻게 덜어 줄 수 있을까? 사랑스러운 뒷동산을 어루만지는 즐거움만 존재할 순 없을까?
한여름 산 소나기 엉겁결에 찾아오면 풀뿌리는 언덕 흙더미에 뿌리를 얹고, 드센 바람에도 여유를 부리며 산을 감싼다. 간간이 찾는 길손도 해진 곳 다독이며 모두의 뒷동산을 보듬어야겠다. 한여름 익어 무더위 숙여질 즈음, 고요한 뒷동산 성급히 가을에 자리 주려 한다. 산 끄트머리 포도밭 농부 손길 바빠지고, 여름의 끝을 달구 진한 포도 향이 계절을 장식한다.
반 시간여를 그늘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산의 높낮이가 적당히 반복되어 온몸에 자극을 주며 작은 인내를 요구한다. 여기까지는 뒷동산의 초입으로 바로 좌측 길을 택하면 포도밭 골짜기다. 적당한 수의 복숭아꽃이 산 색깔에 조화를 맞추어 준다. 멀리 작은 저수지는 낚시 드리운 태공덕에 한층 좋은 그림이 되고,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마음마저 한가롭다. 물끄러미 앉아 있는 저수지 물은 파란 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오솔길 곳곳에는 서민들 건강을 위해 손때 묻은 운동기구들이 정리되어 있다. 바람 따라 밀려드는 싱싱한 솔향에 때로는 끼어든 밤나무 꽃 향이 혼돈스럽다. 가을이 익을수록 꽃술을 털어낸 밤나무는 버거워진 열매에 힘겨워한다. 자연에 줄 선물을 참아내며 계절은 더 성숙해지고 있다.
여름이 쇠해져 가을의 초입에 다다르면, 산 밑 골짜기에 자리한 포도 내음이 대단하다. 도심 속 시골 아낙 입담 속에 불쑥 내밀며 포도 맛 보이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어릴 적 시골인가 싶어 무한정 오른 뒷동산 길은 오늘도 역시 후회가 없다. 골짜기 포도나무는 무거운 결실에 힘에 겹고, 햇살에 익어가는 포도가 마냥 싱그럽기만 하다. 굽어진 가지마다 열린 포도송이가 찾아온 늦여름을 일러주고, 뿜어낸 포도향은 산을 덮었다.
지난여름 찾은 포도밭, 한낮부터 막걸리 즐기던 포도밭주인이 무작정 자리를 권했다. 버스 타려 한다는 말에 포도를 사지 않아도 좋단다. 편히 앉아 시내버스가 올 때까지 먹고 가란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횡재를 만났다. 한 잔 술에 얼큰해진 주인장, 시원한 막걸리로 시름 달래며 낯선 길손에게도 거푸 권한다. 포도에 막걸리까지, 다시 찾은 뒷동산 길은 언제나 즐거움이 있다. 수많은 사연을 실은 주인장의 막걸리 한잔, 살아 볼만한 동네임을 포도밭에서 알고 간다. 해마다 찾아오는 도심 속 포도밭, 여지없이 아내도 따라나선다.
아내와 등산길에 찾았던 포도밭, 오는 비를 피할 겸 들어오라는 말에 원두막에 올랐다. 그칠 비를 기다리며 먹어보라 내민 포도를 하염없이 먹어도 멎을 줄 모른다. 한 송이를 먹고 나면 또 한 송이를 건넨다. 포도를 얻어먹다 기다리는 버스도 지나쳤나 보다. 걱정할 염려가 없단다. 포도밭 손님이 집까지 태워다 주는 은혜까지 입었으니, 이만하면 도시 속 시골 인심 치고는 옹골차지 않은가?
늦여름 등산길이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포도밭 집, 어느 집을 막론하고 즐거움을 준다. 개발 명목으로 붉은 깃대가 나부끼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한다. 태안 앞바다의 기름 찌꺼기를 보고 인간의 무모함을 탓하며 울었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달콤함 포도향을 내는 시골 아낙들의 구수한 정담이 그리워서일까? 언제나 그리운 포도밭을 뒤로하고 산에 오르려니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