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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내린 골짜기, 따가움 속에 가을이 오고 있다.

(장마철의 생각)

by 바람마냥

후드득거리며 비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5시, 가로등도 자취를 감춘 골짜기는 컴컴하다. 새벽부터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는 영락없는 장맛비소리다. 얼른 창문을 열자 산너머에서 거센 빗줄기가 넘어온다. 골짜기에서의 삶은 걱정이 많다. 눈이 많이 와도 걱정이고, 비가 많이 와도 또 걱정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언론에선 곳곳에서 물난리가 났다고 하니 걱정스러움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가볼까를 망설이다 나가봐야 거센 빗줄기를 감당할 일이 없기에 책상 앞에 앉았다. 이중으로 된 창문을 굳게 닫으니 이웃집 닭 우는 소리는 먼 동네소리다.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열까 말까를 망설이다 그냥 있기로 했다.


하얀 눈 내리는 날은 너무 좋았다. 초가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이 탐스러워서다. 우물을 덮고 있는 향나무에 앉은 눈은 포근한 솜이불이었다. 감이 손을 댈 수 없는 아름다움에 숨이 멎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은 하양이 아닌 잿빛이었다. 대지에 가까워지면서 잿빛은 하양으로 변했고 대지를 온통 맑음으로 바꾸었다. 언제나 눈이 오면 진심으로 좋아하던 이유다.


봄비가 내리는 날, 빗소리가 좋아 마냥 비를 바라봤다. 하늘에서 바람에 날리며 내리는 비,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았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면 빗줄기가 달라졌다. 후두득 거리며 내리는 비는 세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자그마한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흙탕물 때문이다. 길을 순식간에 점령하였고, 앞 논은 물이 가득해졌다. 우산도 없는 시절, 도롱이라는 볏짚으로 만든 비가리개가 전부였다. 도롱이를 쓴 이웃집 아저씨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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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논의 물꼬를 보기 위해서다. 한쪽으론 벼가 자랐고, 논두렁엔 두렁콩으로 걷기도 힘겹다. 간신히 벼와 두렁콩 사이를 지나 물꼬를 열어 놓는다. 순식간에 흘러내리는 장맛비는 동네를 호령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오래전 시골의 풍경이다. 골짜기에 장맛비가 내리는 아침, 도랑물이 으르렁거린다. 이젠, 그만 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해볼 방법이 없다. 창문너머 산말랭이가 검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저 구름이 지나야 하는데, 무심한 닭소리는 여전하다. 하얀 눈이 좋았고,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가 그리웠다. 언제나 시골살이가 즐거웠던 시절이다. 장맛비가 내려가는 소리는 아직도 좋은 소리다. 맑으면서도 거침없는 소리여서 좋다. 초등학교의 입학은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현실은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학교를 가야 했고 부모님은 일을 해야 했다. 우산이라곤 구경도 못하던 시절, 허름한 비닐조각이 비가림의 전부다. 비닐을 쓰고 가는 학교는 너무 싫었다. 차라리 비를 맞으며 가는 편이 훨씬 편했다. 비를 맞는 기분은 초등학교시절에 알아냈다. 비가 내리는 길, 옷이 젖을까 걱정이었다. 어떻게 하면 옷을 적시지 않고 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생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젖던 옷이 금방 젖어서다. 에라, 모르겠다. 오는 비를 온통 맞으며 걷는 기분,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젖으면 젖는 대로 걸었다. 속까지 시원해짐을 벌써 알아냈다. 젖을 것이 없었다. 내줄 것을 다 내준 기분, 아직도 남아있는 기억 속의 후련함이다. 세월이 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눈을 피해야 했고, 비를 멀리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한 고육책이다. 눈이 오면 창을 연다. 얼마나 눈이 내렸는가가 궁금하고, 차를 운전할 수 있을까가 걱정되어서다.


산 골짜기의 삶은 물과의 전쟁이다. 물이 없어도 곤란하고 많아도 걱정이다. 화단을 돌봐야 하고 텃밭을 길러내야 한다. 지하수를 사용하며 삶을 이어가야 한다. 가뭄엔 물 걱정이고, 장맛비엔 또 걱정이다. 습기와의 전쟁을 벌어야 해서다. 공기가 습하면 집안이 습해지며 곰팡이가 나타나고, 각종 벌레가 등살이다.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적당한 빗줄기는 없을까?


인간은 자연 앞에 무기력하다. 밀려오는 구름을 밀어낼 수 없고, 맑은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자연이 주는 대고 받고,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빗줄기가 갑자기 거세진다. 지붕을 두드리는 기세가 두렵다. 아내는 걱정스러워 현관 앞을 지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자연 앞이다. 검은 구름 밑에 싸울 듯이 밀려오는 장맛비, 도랑은 벌써 흙탕물이 가득이다.


산부터 내려오는 흙탕물이 온갖 잡동사니를 실어갔다. 순식간에 고개를 숙인 도랑가의 잡풀들이 안쓰럽다. 미꾸라지가 있었고, 붕어가 있었으며 삶이 있었던 오래 전의 도랑물이 아니다. 헐떡이는 흙탕물에 아무것도 살지 않는 골짜기의 물, 거센 함성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거대한 바위돌을 굴려 놓았고, 거친 나무등걸을 밀어 놓았다. 찌는듯한 더위가 내리는 골짜기엔 아직도 장마의 흔적이 뚜렷하다.


7월도 서서히 지나고 8월이다. 8월 초면 서늘함이 찾아오던 골짜기는 예전이야기다. 9월이 되어도 따가움은 그칠 줄을 모르는 세월이다. 모두가 인간이 만든 굴레다. 자업자득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굴레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들판의 곡식이 익어가는 8월, 인간은 견디기 힘든 하룻밤을 기어이 넘겨야 한다. 장마가 지난 골짜기의 풍경은 따가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엊그제 입추가 지났으니 서늘함도 곧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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