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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살며 생각하며, 마냥 평안한 가을 들판)

by 바람마냥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하루를 서너 마디의 말씀으로 메우셨고, 그마저도 지나칠 수 없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밥을 달라'든가 아니면 '일 나간다'등의 삶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문구만을 되뇌셨다. 왜 그러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 한참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는 그래서 말씀을 하지 않으셨구나! 세상이 만들어준 아버지만의 삶의 방식이 아들에게도 이어짐은 세월이 알려 준 귓속말이었다. 골짜기의 살림살이는 늘 뻔한 구성이다. 마당에 풀을 뽑고 잔디를 돌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돌아서면 키를 키운 잡초들, 크는 것이 업이니 할 수 없지만 가끔은 야속하다. 땀을 흘리며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아낸다. 갑자기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부모님이 뙤약볕에서 고추를 따고 계신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밭으로 달려갔다. 긴 밭고랑을 차지하고 고추를 따는 철부지의 마음은 오로지 부모님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었을까?

언제나 보고 살아온 일이 그렇기에 외면할 수 없다. 당연히 내 집일이니 해야 하고, 언제나 일터에 계신 부모님이 안쓰러워서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왔다. 삶에 지친 아이들이 쉼을 위해 집을 찾은 것이다. 어미가 해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싸준 반찬을 들고 집을 떠난다. 혹시, 아비가 하는 일이 궁금하지 않을까? 작은 텃밭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나름의 일에 지쳐있고, 평소에 보고 자란 일이 아니어서일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그들의 하루였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생각도 없었고 보지도 못한 일, 과연 이야기를 하면 관심이나 보이려나? 어림도 없는 일임을 알고 입을 닫는다. 말이 없어진 이유다.


사람은 공통 관심사가 있어야 이야기를 하고 관심을 갖는다.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야기할 소재가 없이 살아왔다.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엔 고추를 따야 하고, 소 먹이 풀을 베어와야 했다. 아버지의 관심사였고 집안의 큰 일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나의 삶이 구축되었다. 아버지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버지는 망설였으리라.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들, 천정에 전구를 갈아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아들이 잠을 자면 기다려야 했고, 밥을 먹길 기다려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아비의 부탁을 아들놈이 들어줄까? 혹시나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 거기에 화를 내면 감당할 수도 없다. 부모 자식사이에 불편함만 생기기 때문이다.


화를 낼 수도 없고, 이해를 위해 긴 설명은 자신이 없다. 더없는 언어로 덮어 씌우면 어떻게 할까도 두려워서다. 입을 닫고 사는 것이 양방을 위해서 훨씬 수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비는 아비의 일을 했고, 자식은 자식의 일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어울리는 동료들도 삶의 방향이 다르다. 제 할 일을 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 섣불리 내 길을 이야기했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외면을 당할 수도 있다. 좋은 방법이라 일러주면 어림없다며 외면한다. 세월을 보내면서 입을 다물어야 편하고, 상하는 마음이 줄어든다.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났다. 신기함에 웃었고 정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며 여행을 한다. 삼사일이 지나면 달라진다.


친구의 좋은 면보단 불편함이 보여서다. 어쩔까 망설이다 한마디 거들면 탈이 나고 만다. 그예 입을 다물어야 편한 여행이 됨을 알게 된다. 길거리에서 만난 젊은이, 도저히 이해 못 할 행동이다. 세월을 앞세워 한마디 건넸다간 호된 봉변을 당한다. 나이를 무기삼지 말라는 말을 퍼붓는다. 한대 얻어맞지 않았으니 다행이란 생각으로 돌아서야 하니 입을 닫는 것이 편하다. 나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월에 할 말이 없어졌다.


아침마다 찾는 체육관엔 작은 샤워실이 있다. 아무도 없는 샤워실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모든 불은 환하게 켜져 있다. 샤워기는 제멋대로 놓아져 있는 모습에 당황스럽다. 얼른 제자리로 돌려놓고 선풍기를 끄고 나오지만 말은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서 한 마디 해야 하나? 아직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겁쟁이 꼰대이지만 늘 아쉬움 속에 살아간다.


나는 용기가 없다. 누구도 설득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전화를 해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외면하고, 어른에게 불손해도 못 들은 척하고 만다. 나름대로의 삶을 인정해 주면서 나의 길을 갈 뿐이다. 나는 그대를 이해시킬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다. 어느새 긴 세월을 보내면서 이런 세월일 줄은 몰랐으니, 서로의 말이 없어지는 요즈음인 이유다. 이번 생엔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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