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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Aug 08. 2020

가을로의 始發, 연초록과 빗소리

연초록의 잔치(멕시코, 칸쿤에서 만난 풍경)

새벽녘, 가느다란 보슬비가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뜨인다. 뿌연 안갯속에 찾은 보슬비는 안개 바람을 안고 찾아와 빗물인지 안개비인지 그것이 그것인 듯 눈앞에 어른댄다.  바람이 몰고 온 소나기처럼 요란스럽지 않기도 하고, 살랑대는 바람 탓에 유리창에 살짝 부딪치는 빗소리는 듣기 좋은 맑은 소리이다. 보슬비는 소나기처럼 사납지 않아 좋고,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지 않아 좋다. 보슬비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에 닿는 앞산의 풍경은 넋을 놓고 바라보기 충분해 창가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보슬비에 흔들리는 산속 초록이 신비스럽고, 멀리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가느다란 실 줄기 된 춤 사래에 저절로 흥이 난다. 이때쯤 되면, 오래전 뒤울 감나무엔 파란 싹이 돋아 연초록으로 물 들었고, 뿌연 안개비 먹으며 연초록은 서서히 진초록으로 물들어 갔다. 가끔 찾아 주는 골바람에 안개비 털어내고, 내리쬐는 햇살에 몸 말리며 하루하루 더 진한 초록으로 물들어 간다.


연초록이 한참 깊어질 무렵 감나무엔 자그마한 꽃이 피기 시작하고, 가끔 내려주는 봄비는 연초록을 흠뻑 적셔 봄날은 더 풍성해진다. 차츰 봄이 익어갈 무렵, 감나무엔 자그마한 꽃들이 만개하고 초록과 어울린 감꽃은 나무와 하나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이때쯤 내리는 비는 한층 거센 바람을 몰고 오니, 아스라이 매달린 감꽃은 감내하기 어려운지 작은 열매 남겨놓고 떨어져야 했다.

봄비에 촉촉해진 아기 감은 맺힌 물방울이 햇살에 반짝이며 초록을 과시하고, 덩달아 감나무엔 뭉글뭉글 빗물이 가득 맺힌다. 오가는 바람에 놀란 물방울 떨어지는 초가집은 아직도 고단한 낮잠에 한창이고, 비에 젖은 초가집은 한 방울씩 빗방울을 쓸어내야 했다. 여름이 깊어 빗줄기가 굵어질 무렵이면 감은 어느새 자라 짙푸른 초록이 역력해지고, 거센 빗줄기를 감당하기 힘든 아기 감은 기어이 떨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빗물은 초가지붕을 타고 내려 네모난 안마당을 휑하니 돌아 만나는 돌에 거품을 주고, 야트막한 하수구 향해 달음질친다. 사방에서 몰려든 빗물이 모여 커다란 물줄기가 형성되고 다시 도랑에서 만난 물줄기는 어느새 도랑에 가득하다. 도랑엔 어느새 물로 가득 해져 간간이 버티고 있던 돌다리는 어느새 흙탕물에 자리를 내주었고, 흙으로 간신히 버티던 언덕은 거센 물줄기에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한바탕 소나기로 온 동네가 소란해지고 나면 시골 동네는 조용한 정적에 휩싸이고 먼 산엔 아름다운 무지개가 솟아오른다.


햇살 내려앉은 고추밭 가장자리 옥수수 잎은 작은 바람에 힘겨운 듯 흔들리고, 언제 나왔는지 꼭대기 개꼬리도 덩달아 춤을 춘다. 작은 바람이 버거운 하얀 옥수수 꽃은 바람에 날려지고, 발아래 자라난 고춧잎에 앉아 하얀 그림으로 태어난다. 덩달이 껑충한 고추도 하얗게 꽃을 피워 어느새 작은 고추를 맺었고, 울타리 된 옥수수와 한껏 여름날을 즐거워한다.


가끔 찾아오는 여름 매미가 옥수수에 몸을 싣고 한 여름을 노래하니, 덩달아 매미 가족들이 합창으로 응답한다.

수년간 지하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리는 여름 매미는 열흘남짓 살아감이 아쉬워, 오늘도 님을 찾는 피 터지는 울음소리로 한 여름 푸르름에 덧칠을 한다. 이때 찾은 작은 바람 심술에  매미는 화들짝 놀라 허공으로 박차 오르고, 옥수수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다.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  옥수수는 수염을 거무스름하게 물들이며 영글었다는 신호를 주고, 고추 밭고랑마다 빨강 고추가 한가득이다. 초록이 한 껏 익어 텃밭 고추 빨강 옷입고 가을 재촉하면, 고추잠자리 맑은 하늘에 떼 지어 나타나니 푸른 하늘 더 높아져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고추잠자리 하늘을 맴돌면 들녘은 어느새 가을 색으로 갈아입었고, 텃밭 고추밭은 빨강으로 물들어 시골 아낙 손 길 바쁘기만 하다.


옥수수 잎은 어느새 갈색 옷 갈아입고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줄 즈음, 시골 마당은 빨간 고추 멍석으로 가득하다. 마당 가득한 붉은 고추 따가운 햇살에 몸 맡기고, 하늘가 맴도는 고추잠자리와 어울려 가을색 완연하니 들녘은 가을 물결로 한결 짙어진다. 덩달아 진빨강 코스모스는 가을 고추잠자리에 쉼자리 되어주고, 성스런 이 가을로 서서히 영글어 간다.


뒤울 감나무엔 붉은 감이 가득해 느닷없이 떨어지는 붉은 홍시 감나무의 허세 같고, 떨어진 감나무 잎은 사방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지나던 새들은 붉게 물든 감에 정신줄을 놓았고, 느긋한 오후 한때 재잘대며 가을을 맞는다. 어느새 가을 저녁이 서산으로 다가와 산새들 온 적 없이 조용해지면, 고요한 시골 동네는 고요한 정적 속에 잠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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