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날)
가을비 오는 골짜기엔 나뭇잎에 부딪치는 빗소리뿐이다. 이웃들도 일찍부터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자주 찾아오던 동네 구경꾼들도 뜸하고, 산짐승들도 종적을 감추었다. 골짜기는 동물의 왕국이다. 고라니가 오고 길고양이들이 오가는 동네, 산새들도 오간데 없다. 가느다란 도랑소리만 살짝 더할 뿐이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시끄럽던 닭들도 쉼을 갖는 중, 더러 개구리 우는 소리가 '시'정도의 울림을 준다. 조용하던 골짜기에 빗방울소리가 커졌다. 순간적으로 빗줄기가 굵어진 것이다. 산을 넘은 바람마저 골짜기를 움츠리게 한다. 자연의 위대함에 골짜기는 숨이 멎었다.
가을비 내리는 골짜기엔 무엇이 좋을까? 놀거리라곤 아무것도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가끔은 소프라노 색소폰이 울어줄 뿐이다. 서재를 지키고 있는 소프라노, 빗소리와 합치면 그럴듯했다. 한가한 곡을 골라 심심함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가끔은 망설여진다. 혹시라도 불편한 이웃들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다행히 동네는 온종일 인적이 드물어 좋다. 가왕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골짜기를 메운다. 시원함에 애절함도 끼어든다.
새벽부터 운동을 했더니 몸이 나른하다. 가을비가 추적이는 날이니 낮잠이나 즐겨볼까? 나른함에 서툰 잠을 밤잠이 싫어할까 두렵기도 하다. 새벽에 잠이 깨면 외롭다. 이런 생각과 저런 고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외로움도 찾아오고 두려움도 있다. 세월이 만들어준 몸이 노고노곤해서다. 서둘러 체육관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돌고 도는 삶은 몸이 나른할 수밖에 없다. 오래전, 감나무 밑에서의 낮잠은 맛있는 그리움이다.
여름날, 감나무 밑 툇마루에서의 낮잠은 떨칠 수 없었다. 햇살이 감나무 위를 지날 즈음에 잠든 낮잠, 햇살은 얼굴에 떨어지기도 비켜가기도 한다. 눈부심에 깨어났다. 여기가 어디인가 순간 망설이는 사이, 파리 때문에 손을 휘젓지만 그 맛은 달콤했었다. 부모님은 들에 가시고 홀로 있는 집은 쓸쓸했다. 바람에 떨어지는 감나뭇잎이 툭하고 소리를 낸다.
가을날을 알려주려 찾아온 고추잠자리가 마당을 돈다. 허공을 맴돌며 또 그 자리다. 어떻게 저리도 빨갛게 물이 들어 있을까? 여기엔 꺽다리 코스모스가 있어야 했다. 껑충한 키에 진빨강 꽃을 달고 있는 코스모스가 가을임을 알려준다. 빨강과 찐빵강이 어우러지는 가을이었다. 어린 시절의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기억이다. 골짜기에 둥지를 튼 지도 몇 년이 흘러갔다. 자그마한 면사무소동네는 별 것이 없다.
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우체국과 행정복지센터에 농협이 자리하고 있다. 시골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을 싸게 파는 로컬 푸드도 있다. 건강을 위해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명소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불러 모을까? 시골 냄새가 묻어 있는 채소와 먹거리가 가득이다. 신선하고 저렴함이 경쟁력이다. 발 디딜 틈이 없기도 한 상점이 시골살이를 살찌게 해주고 있다. 도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표본이다.
여러 식당도 자리 잡고 있지만 비 오는 날엔 칼국수집이 단연 인기다. 비가 오는 날, 면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특별하진 않지만 떨칠 수 없는 맛 때문이다. 칼국수 특유의 냄새가 나고, 아무 힘이 없는 국수가락이다. 여기에 맛깔난 김치와 지고추가 전부다. 주인장이 친절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최소한의 인사만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왜 맛집이라고 찾아올까?
오래 전의 추억의 맛이다. 특별한 방식도 아니고, 엄청난 맛도 아니다. 시골스런 국수에 호박이 고명으로 들어가고, 여기에 지고추가 전부다. 할머니를 모시고 아들내외가 찾아온다. 딸이 엄마, 아빠와 함께 국숫집에 찾아온다. 얼큰한 칼국수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문을 나선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비가 오면 어울리는 풍경은 또 있다. 우두커니 서서 골짜기를 둘러보는 것이다. 먼산을 바라봐도 좋고, 가까운 곳을 바라봐도 일품이다. 대관령이 따로 있다던가?
먼 산엔 하얀 물안개가 덮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채화다. 꾸역 구역 움직이는 물안개가 살아 있다. 밑으로는 푸른 산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 편의 드라마 광경이 펼쳐지는 골짜기다. 골짜기 풍경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빗물이 나뭇잎과 부딪치는 소리가 우세하다.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나뭇잎과의 만남, 비가 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암시다. 드세게 오던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골짜기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밝은 빛이 찾아오며 산을 넘을 햇살이다. 미쳐 걷어내지 못한 안개가 햇살을 만났다. 어디서 이런 풍광을 만날 수 있을까? 대관령이 넘어왔고, 한계령이 몰려온 것이다. 자연과의 어울림이 힘들다는 말을 한꺼번에 씻어낸다. 초록과 하양이 그 위에 햇살이 빛나는 골짜기다. 여기에 바람도 합세했다.
바람도 산을 훅 넘어왔다. 초록을 흔들어 하양 물방울을 털어낸다. 맑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만난 햇살, 햇살의 신비함이다. 순간의 반짝임은 신비함이 묻어있다. 방울방울 떨어짐이 예술이다. 비가 오고 안개가 내려왔고, 다시 햇살이 찾아온 골짜기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 소리 없이 오가는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함, 여기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 조용한 골짜기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