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정리하는 아침)
맑은 하양이 빛나던 구절초가 스러지고, 노랑으로 빛을 발하던 산국도 가을을 정리했다. 자그마한 정원을 밝혀주던 가을의 진객들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을, 한 해가 아쉬워도 아름다운 색깔을 낼 수 있어 고마운 가을이었다. 맑은 하양과 노랑이 스러지던 날, 골짜기는 한 없이 허전했다. 어떻게 이 가을을 살아가야 할까?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꽃들이 지켜주던 정원이었다.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듯이 꽃들은 스러지고, 텅 빈 정원이 된 것이다. 맑은 햇살이 찾아오던 날 나의 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 전에 들여놓은 노랑과 붉음이 어우러진 세 개의 국화 화분 때문이었다. 가을이면 집안을 지켜주는 국화를 들여놓은 것이다.
초봄, 혹독한 골짜기 추위를 견디며 두터운 땅을 가라 놓았다. 여기저기서 삶의 환희를 느껴보는 몸짓이었다. 바위틈에서 구절초가 살아났고 산국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작은 삶이 언제나 기를 펴고 꽃을 피울까? 한 해를 기다리며 키를 키워냈다. 그렇게 봄이 가고, 긴 여름이 찾아왔다. 왜 이렇게 덥고도 지루했던가? 억센 장마를 이겨내느라 어린 삶은 고단했다. 가을꽃은 기다림에 목이 말랐다. 드디어 가을이 온 것이다.
맑은 하양이 좋아 구절초가 보고 싶었다. 무심한 듯 바라보는 달빛 아래 핀 구절초가 좋아서다. 아무 생각 없이 맞이하는 하양과 하양, 달빛과 구절초였다. 아내와 함께 구석구석에 구절초를 심었다. 한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번식력이 뛰어난 어린싹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왜 이럴까를 고민하며 기다린 가을은 헛되지 않았다. 한두 송이씩 꽃을 달았던 구절초가 올핸 만개했었다. 자그마한 뜰을 가득 메웠던 구절초, 계절의 순환을 이길 수 없으니 내년을 기약하고 말았다. 하양이 스러진 정원이 허전했지만 노랑이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언덕을 만들었던 산국은 황홀했다. 바위틈에서 꽃을 피우고 바람을 탔다. 바람그네를 타듯이 흔들거리던 산국, 몇 포기를 집안에 들였다. 미안함에 몇 뿌리만 뜨락에 심은 것이다. 자리 탓을 하며 한해를 머뭇거리더니 올해서야 꽃을 피웠었다. 맑은 노랑이 그렇게 빛날 줄이야! 흔들림을 따라 벌들이 따라나섰고 나비가 방황했다. 꽃과 어울리는 벌과 나비의 조합은 신비했다.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은 어울림이었다. 신선한 바람에 맑은 노랑, 여기에 벌과 나비의 몸짓이 가을을 축복했었다. 골짜기의 가을이 짙어졌다.
구절초가 꽃을 털어냈고, 산국이 몸을 사렸다. 찾아오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골짜기의 허전함을 무엇으로 달래 볼까? 허전한 가슴속엔 가을을 장식하는 국화가 있었다. 화단 곳곳에 피었던 국화의 화려함이 떠올랐다. 오래도 어김없이 국화를 들여놓은 이유다. 해마다 하는 가을날의 의식, 국화와의 만남이다. 노랑이 있고 붉음이 있으며 노랑과 붉음의 어울림이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성스런 의식이 있었으니 국화화분 세 개를 맞이하는 일이다.
가끔 골짜기 바람이 심술을 부린다. 화분도 그리고 나무도, 순식간에 힘을 잃는다. 아침이면 햇살을 찾아 국화를 진열한다. 오가는 사람들이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햇살 좋은 곳이다. 지나는 사람들이 가을을 알게 하고, 맑은 가을을 축복하고 싶어서다. 여기엔 바람길을 피해야 했다. 하루 종일 국화가 온전해야 해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추위를 피해 줬다. 화분을 들여놓고 노랑과 붉음을 지켜야 했다. 가을 내내 국화와의 만남은 이어졌다. 여기에 초가을이 찾아온 골짜기, 서서히 노랑과 붉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지쳐가는 노랑과 붉음을 언제 마무리를 할까? 해마다 하는 의식이지만 언제나 망설인다. 지는 국화가 아쉽고 한 해가 더 아쉬워서다. 드디어 날을 잡았다. 남아 있는 국화를 화단으로 옮겨 심었다. 화분에서 국화를 뽑는 순간, 아쉽지만 편안했다. 왜 이렇게 편안했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아쉬움보단 국화를 제자리로 보낸다는 느낌에서다. 삶을 불러주고 이어주는 대지로의 귀환, 추위를 견디며 싹을 틔운 곳이다.
아름다운 색으로 가을을 만들었고, 봄을 준비하는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자그마한 화단에 자리한 국화, 거기엔 몇 가을을 이어 온 꽃들이 숨어있다. 지난해의 국화가 있고 구절초가 있으며, 노란 산국이 있다. 고단한 겨울을 이겨내면 봄이 올 테고, 다시 계절은 지난봄을 불러 줄 것이다. 여기엔 또 싹이 돋아나고, 비가 올 것이며 지난해 그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계절은 이렇게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한 해를 또 장식하고 있었다.